<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말과 글이 그 무게를 되찾는 한 해가 됐으면

새해 벽두엔 모두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새해 아침은 ‘창조적 시간’이 됩니다. 그게 바로 미래를 위한 힘의 원천입니다. 내일의 더 나은 삶을 실천할 수 있는 희망의 영역입니다.

희망은 현재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살아 있는 현재’입니다. 아름다운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과거의 여운과 미래의 예기가 함께 하듯, 생생하게 흐르는 ‘현재’속에는 항상 직접적인 과거와 미래의 영역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렇듯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통해 재구성됩니다. 어찌 보면 과거는 하나의 상품과 같은 카테고리일 뿐, 그것은 이미 물화된 사실에 불과합니다. 미래적인 것으로 설정해 놓은 목적조차 고정되지 않습니다. ‘아직 이뤄지지 않은 미래’는 이미 현재에 있습니다. ‘성취된 과거’는 미래에서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항상 중심은 현재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현재’를 근거로 하여 창조적으로 규정될 시간입니다.

그러나 미래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진정한 현재’라는 것도 현실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매일 걸어 다니는 길이 어느 날 갑자기 벽이 되어 일어설 정도로….

그러나 미래는 우리의 의지의 산물입니다. 그 속을 무엇으로 채우느냐 하는 우리의 기획과 노력에 따라 그것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는 바로 현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의 총합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마음에 남겨놓은 흔적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제주의 바람직한 미래를 열망하는 우리의 의지’가 마치 미래를 위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그려지는 것은 ‘언어적인 문제’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엔 ‘현재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와 느낌과 감정이 어우러져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것은 가끔 우리들의 비판적 의식에 투영된 상으로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비판언어’가 필요합니다. 자유롭지 못한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우리 사회에 깃든 헛된 기대와 유혹을 물리치기 위한 ‘정의로운 분노’도 그래서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들의 언어는 가뜩이나 무성하고 부화(浮華)합니다. 심하게 뒤틀려 있기도 합니다. 낯선 어휘들이 우리들의 실존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말’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서로가 “지역주민을 위한다”고 큰소리치지만, 막상 그 말 속에는 지역주민이 없는 ‘빈껍데기 말’들이…. 우리들의 속을 박박 긁어놓는, 이른바 ‘유체이탈식 화법’이란 것도….

말은 있고 뜻은 없습니다.(有言無義) 원효스님은 그것을 ‘저울대’에 비유합니다. “…무거우면 저울대가 내려가고, 가벼우면 반드시 올라가야 하거늘, 만약 가벼운데도 저울대가 올라가지 않고, 무거운데도 내려가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씀도 합니다. “…자신과 의견이 같으면 옳다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그르다 하니, 이는 마치 관을 통해 하늘을 보는 자(謂管窺天)가 ‘그 관을 통해 보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그 푸른 하늘을 보지 않는 것’이라는 말과 같다…” 신랄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 말씀에 기대어 감히 묻습니다. “어찌 자기들만 푸른 하늘을 본다고 하는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욱 두렵습니다. ‘비판언어’를 이야기하지만, 말과 글로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깊습니다. 주제넘게 ‘비판’의 이름으로 ‘합리’나 ‘공정’을 들먹이지만, 그것도 함부로 자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지역사회에 다양한 사회계층이 존재하듯,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 표준도 또한 다층적 지평과 전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판언어’는 자칫 또 다른 편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비판언어’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표피적이고 즉물적인 말과 글에 ‘살아 있는 현재’가 장악되는 비극을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바람직한 미래’는 결코 올 수가 없습니다.

138717_156684_1046.jpg
▲ 언론인 강정홍
‘우리의 의식’은 특정한 계기나 조건에 의해서 다시금 깨어납니다. 위언(危言)의 길을 넓혀야 합니다. 그게 ‘바람직한 미래’를 담보합니다. 말길이 막히면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지역사회엔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제발 새해에는 말길이 원활하게 트이고, 그리하여 말과 글이 그 무게를 되찾는 한 해가 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 언론인 강정홍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