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우리의 정체성은 ‘제주’라는 자연과 문화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상징체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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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은 저 빛나는 한라산과 함께 그 영겁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는 자연의 일부로 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정체성은 한라산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따라서 제주의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 제주의소리DB

누군가 있어 이야기합니다. “그 무엇이든 받아들이되 우리의 정체성만 지켜나가면 된다”고…. 맞는 말입니다. 받아들임(=개방)과 지켜나감(=자주)은 두 개의 경영축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구사하면, 크게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차하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맙니다. 전자에 무게가 쏠릴 경우, 지금 우리가 보듯, 지역의 정체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습니다. 반대로 후자에 무게를 둘 경우, 지역사회가 고립되고 정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중(中)’을 강조합니다. 그곳이 바로 양자의 관계성이 극대화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얽혀 돌아가는 이 시대에 도대체 ‘제주적인 것’이 존재하는지, 이런 질문은 하나같이 고통스럽습니다. 국가 정상급 인사들이 모여 ‘제주포럼’이란 이름으로 ‘신뢰와 화합의 새로운 아시아’를 논하는 이 시대, 이 좁은 땅 한 구석에 ‘영어교육도시’를 만들어놓고 그것도 부족하여 ‘과실송금 문제’에 열을 쏟는 이 시대, 중국자본을 끌어들인답시고 신제주거리 이름을 아예 중국회사명으로 붙여놓는 이 시대, 바로 이런 시대에 ‘전통’이나 ‘제주사람’같은 정체성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할수록 참으로 암담합니다. 차라리 초라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오늘날 ‘제주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인 듯싶습니다. 아니 불필요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 빛나는 한라산과 함께 그 영겁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는 자연의 일부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주의 자연이 훼손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분노하는 사람들, 중국자본의 제주 땅 점령을 보면서 걱정하는 사람들,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어쩌다 ‘제주출신’ 인사들의 활약상을 보고 괜히 기뻐하는 사람들, 자리물회에 소주를 곁들여야 속이 풀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제주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한 구석에서 외국어로 씨부렁거려도 역시 우리는 구수한 제주사투리로 이야기합니다. 전통이 와해되는 것과 비례해서 다른 한편으로 전통에의 집착도 그만큼 강해집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주체의 ‘자기의식’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의 집합입니다. ‘제주사람’이 자신을 하나의 동일한 ‘제주사람’으로 인지하게 되는 공통감각입니다. 저는 그것을 우리의 고유사상에서 찾습니다. 같은 풍토적 역사적 환경 속에서 집단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저절로 형성된 공통의 사고방식이 제가 찾고자 하는 정체성입니다. 우리들만이 갖는 독특함이 바로 고유성이라면, 결국 ‘제주의 정체성’이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우리의 것’입니다. 한 철학자의 말마따나 그건 ‘관계 맺기’와 ‘차이 짓기’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를 지탱해온 토대가 흔들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무엇에 의해 혼란을 느끼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두려움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제주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결정적 물음들을 외면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 무감각입니다. 그것이 분명해질수록 그것은 더 큰 두려움의 모습으로 엄습합니다. 생활이 좀 나아졌다고 하여, 물론 그것도 따져봐야겠지만, 우리 정체성이 농락당하고, 그것을 돌아 볼 성찰의 능력과 그 기회마저 가로막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우리는 ‘제주라는 특수성’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처해 있음’입니다. 그건 우연입니다. 우리는 이 ‘제주’라는 지역사회에, ‘지금 이 시대’에 내던져졌습니다. 그 우연성을 ‘우리에게 던져진 최초의 빛’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그건 피할 수 없는 업보입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시공간적 영향아래서 성립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사유는 이 ‘제주’에서 출발하고, 이 ‘제주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제주에서 태어나고 제주에서 자라고…’ ‘제주사람’을 그것으로 한정하는 것은 진부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지금 이 순간, 삶의 가치의 공유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막연히 ‘제주출신’이라는 그 자체로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정체성은 삶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본질이라기보다는, 드디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영위하는 삶에 의해서 ‘우리’가 형성되고 표현됩니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닙니다. 수많은 삶의 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이 만들어집니다. 물론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저편에 존재하는 미지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만난 사람, 우리가 겪은 일들의 집합입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구성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정체성은 생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간 속에서의 자기동일성으로 이해되는 정체성은, 이렇듯 한 개인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체성은 얼핏 내면의 문제인 듯하지만, 외면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현대가 정체성의 상실 시대라면, 그것은 ‘제주사람’ 개개인의 내면이 와해됐기 때문이 아니라, ‘제주사람’이 살아가야 할 ‘제주’라는 객관적 조건들이 분열됐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주사람’의 내면이 붕괴됐다면, 그건 우리의 정체성의 실종으로 생긴 결과이지, 그 원인이 아닙니다. 제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의 삶의 객관적 조건의 하나인 ‘땅 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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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바다는 우리의 또 하나의 삶의 터전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제주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을 확인하는 것, 그래서 평소에 쓰고 있는 내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 제주의소리DB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우리 됨’은 현존을 통해 확보됩니다. 우리가 현존하는 장(場)이 바로 우리의 자연과 문화입니다. 우리는 제주의 자연과 문화와의 관계를 통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저는 무엇보다도 저 빛나는 한라산과, 그것이 거느리고 있는 ‘제주의 자연’과의 관계성에 주목합니다. 제주라는 자연과 ‘제주사람’의 전체적 연관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전체’는 저 빛나는 한라산을 비롯하여, 저 일렁이는 제주바다와, 저 푸른 제주 하늘과, 그리고 제주들판을 누비는 저 노루와, 오름 자락에 피어 있는 작은 들꽃까지,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났고, 죽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고장이 있게 한 자연적 진화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의 사회적 연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때, 정체성의 실체는 그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자명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제주’라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상징체계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변 세상으로부터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자연은 우리에게 공간의식과 정체성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자연이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과, 우리가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 일치의 경험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따라서 제주의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거기서 살고 있는 ‘제주사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독특한 문화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과 자기정체성이 형성되는데 있어 역사와 전통이 갖는 선험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적 존재입니다. 역사와 전통에 대한 기억은 자기 정체성과 삶의 방향의 확립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역사와 전통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전통에 대한 역사적 기억, 다시 말하면, 전통에 대한 ‘제주사람’ 특유의 태도 자체에 있다는 말은 그래서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역사는 항상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도출해내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 편입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을 위해서도 ‘역사와 전통’은 계속 이야기돼야 합니다. 전통을 일상의 삶에 동화하는 깊이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일 뿐 아니라, 그게 바로 미래를 여는 근본적인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영속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이론적인 노력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건 충성과 사랑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곳을 되돌아보고 존경하는 자에게 속합니다.

그러나 정체성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변경할 수 있고, 스스로 변함으로써 지역사회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정체성은 미(美)와 격(格)을 갖춰 ‘창의성’으로 발전하게 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에 소홀하면 ‘우물 안 개구리’ 소리 듣기에 딱 알맞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주’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확인하고, 그걸 위해 평소에 쓰고 있는 내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 그게 바로 정체성을 찾는 길입니다. 쉽고 편하게 생각하되, 그만큼 진지하고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질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자세가 그래서 더욱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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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제주사람’과 ‘제주라는 공간’이 하나가 되는 지역사회를 만들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올바르게 자각하는 ‘장소의 감각’을 되살리자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태도를 새롭게 하자는 것, 이게 바로 오늘 제가 하고자하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진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변화를 겪으면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제주의 구성원 각자가 ‘제주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데서 비롯됩니다. 그게 바로 정체성입니다. / 강정홍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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