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교과서 국정화로 나라가 들끓고있다. 각종 조사에서 반대 여론이 확인됐는데도 정부는 대통령까지 나서 "국정화!"를 외치고 있다. 범위를 좁혀, 제주에서는 4.3 왜곡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정화 추진의 배경과 몰고올 폐해 등을 릴레이 칼럼을 통해 짚어본다. <편집자 주>

[한국사 국정화 ⑥] 4.3위령탑 앞에서 ‘역사의 아픔’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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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에 있는 4.3 위령탑. ⓒ강정홍

기억은 고통이라 했는데…

‘역사의 아픔’을 보려거든 4.3위령탑을 찾으라던 당신의 말을 따라 마침내 명도암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은 “위령탑 앞에 서 보라”고 했지만, 저는 차마 그 앞에 서지 못합니다. 가슴이 탁 막힙니다. 머릿속이 까마득합니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들어보라던 ‘과거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멀리 떨어진 간이의자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이 글을 씁니다. 역시 4.3사건의 주제는 무겁습니다.

기억은 고통입니다. 아픈 기억일수록 그렇습니다. 그때의 그 끔찍한 악몽을 되살리기 싫어 4.3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아예 귀를 막아버리는 사람들은 차라리 지난날을 잊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망각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잊을 수만 있다면, 잊어야 합니다. 망각은 더 이상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마냥 깨어있는 것이 불가능하듯, 잊어버림 없이 항상 기억 속에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못합니다. 아니,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과거의 아픈 기억에 우리의 가슴이 저밉니다. 오늘도 우리는 가슴앓이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4.3사건을 직접 체험한 세대와, 그리고 그것의 기억에다 그들의 한(恨)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세대가 엄연히 살아있는 지금, 과연 무엇으로 ‘죽은 자’들의 한을 달래고, ‘산 자’들의 상흔을 씻어내고 구원할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어떤 상징물로도, 저 줄지어 서 있는 위령비의 영혼을, 그때의 악몽을 되살리기 싫어 4.3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아예 귀를 막아버리는, 예의 그 사람들의 아픈 상처를 달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으로 그들의 한(恨)을 달랠 수 있을까

당신의 말처럼 저는 지금 ‘기억되지 못한 사람들’의 무덤가에 서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는 4.3사건의 무덤입니다. 그래서 저는 차마 ‘평화공원’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사람들, 그래서 망각을 ‘강요’당했던 사람들을 추념하기 위해 이 위령탑을 세웠지만, 과연 이것으로 그들의 한을 달랠 수 있을까? 잔디를 깨끗이 손질하고,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조각물을 전시했다고 하여 역사의 쓸쓸함이 사라질까? 아직도 4.3사건의 의미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사람들이 그들을 다시 망각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부질없는 좌우 싸움으로 과거를 놓고 제로섬게임을 반복하는 한, 역사라는 거대한 기념비는 속이 텅 비어갑니다. 거기엔 공허한 역사의 반복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방이 조용합니다. ‘거친오름’위로 짙은 회색 구름이 한 조각 흘러갑니다. 역시 추념의 공간은 한적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그 삭막한 추념 속에서 현재의 사람은 과거의 사람과 마주합니다. 당신이 항상 이야기하는 것처럼, 영웅을 기리는 기념탑 주위는 항상 사람들로 붐빌 테지만, 애초 그럴 의도조차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과 대면하는 추념의 공간은 이처럼 한적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이제야 당신이 귀 기울여 들으라던 ‘제주바람 따라 메아리치는 과거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리는 듯합니다. 역사라는 것도 ‘한 사람의 불순한 감정’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이 계절에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우는가’하는 생각이 4.3위령탑의 차가운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전체주의 망령인가

여당대표가 “4.3은 절대 왜곡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는 보도(제주의소리 11월1일, 김무성 “제4.3 역사교과서 왜곡 없을 것”서둘러 진화)를 보고, 평소에 ‘역사적 교훈의 준엄함’을 유난히 강조했던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저 역시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집니다. 당신이 늘 상 이야기하는 4.3의 역사적 의미가, 아니, 역사의 의미가 여당대표의 한마디 말에 좌우될 정도로 그렇게 값싼 것이었습니까? 미처 몰랐습니다. 그들의 애도 감정이야 애시 당초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프로그램화된 정치적 명령에는 어김없이 반응하는 듯한, 그 주체할 수 없는 순발력이 오히려 두렵습니다. ‘전쟁’이라는 말이 아무렇게나 이야기되고, 국정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국민’으로 몰아세우고…. 여기 잠들어 있는 영혼들에 누(累)가 될까봐 그들이 뱉어내는 그 ‘험한 소리’들을 다 옮기지 못합니다. 

저는 거기서 역사적 관점의 다원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다양성까지 무시하는 전체주의 망령을 봅니다. 자존심이 강한 당신은 한사코 아니라고 우기겠지만, 거기선 당신과 저 같은 평범한 개인은 그저 얕잡아보는 대상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국정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다”라는 막말은, ‘국민을 공격대상으로만 여기는’ 그들의 평소의 생각을 여과 없이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처럼 개인에 대한 크고 작은 무시가 쌓이면, 바로 그곳에서 ‘개인보다는 전체를 우선시하는’ 전체주의가 등장합니다. 개인의 행복보다는 전체의 행복이 우선이라고 하지만, 전체주의는 평범한 개인에게 ‘전체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는’ 괴물일 뿐입니다.

그것은 파시즘 같은 극단적인 사례에서만 발견되지 않습니다. 툭하면 자기의 집단에 소속된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을 분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저 편향된 시각에도 그것은 살아 있습니다. 대의를 위해 개인은 희생돼야 한다는 집단주의에도 그것은 어김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전체주의 망령은 집단화를 강요합니다. 평범한 개인은 집단의 구성원임을 증명해야 의심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범주로 포섭되지 않은, 혹은 포섭되기를 거부한 개인은 항상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는다”는 당신의 말은 그래서 틀리지 않습니다.

과거를 현재의 천박성에 들어맞게 할 수 없지 않은가

역사에 있어 관점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도 바로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역사에 있어 개인이 갖고 있는 ‘개인적 편견’과, 정치적 사회적 집단이 갖고 있는 ‘집단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당신이 늘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관점의 다양성과 역사인식의 객관성’은 서로 배척하지 않습니다. 인식지평이 넓어짐에 따라 역사의 의미도 그만큼 다양해집니다. 그렇다면 분명합니다. 과거를 당대의 천박성에 들어맞게 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종북' 운운하면서 '험한 소리'로 사람 속을 긁어놓고 있으니, 그건 '참으로 보기 역겨운 병적인 집착'입니다. 아무리 ‘객관성’을 추구한다고 우겨도,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과거의 의견과 행동을 현재의 자기이해에 따라 재단하는, 극히 ‘주관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그건 ‘역사적 질병’입니다. 이쯤에 이르면 무척 어려워집니다. 이미 제 이해수준을 벗어난 영역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관점의 다양성’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역사를 조망하는 것을 의미할 뿐, 역사를 임의로 날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이 생각한 이념의 틀에 맞추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맞지 않는 사실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의 관점에 관계있는 역사적 사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그리하여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고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바로 올바른 역사관입니다.

‘역사의 아픔’은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줄 것

하나의 관점에만 고착되어 있는 경우와, 자신의 관점에 대한 시각의 교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경우는 다릅니다. 하나의 관점에만 고착될 경우, 그 누구처럼 자신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건 불통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관점에 따라 시각의 교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여러 관점을 결합함으로써 전체적인 상(像)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건 상식입니다. 획일성을 강조하는 ‘국정역사교과서’는 그래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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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안개에 가렸던 한라산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까마귀 대여섯 마리가 까악거리면서 ‘거친오름’속으로 날아갑니다. 조각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쳐다봅니다. 저 흘러가는 구름이 거침없듯, 물론 역사는 결국 모든 것을 심판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에 앞서 역사가 함의하는 언어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어져 가는 오늘을 제대로 성찰하기 위해서도…. 그래서 더욱 “4.3사건의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역사의 이름’으로 믿고자 합니다. “현실에 대한 과거의 위력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의미를 증폭시킴으로써 완결된다”는 말도 함께…. 돌아오는 마음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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