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제주사람’과 ‘제주자연’이 하나가 되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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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중산간의 모습. ⓒ제주의소리DB

‘제주가 제주 아닌’ 듯합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고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어쩌다 거리로 나서면,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마치 ‘제주가 제주 아닌’ 듯합니다. 무모한 개발로 자연환경이 날로 수척해지고, 덩달아 인문환경마저 거칠어지고 있다는 지적은 진작부터 있어 왔지만, 요즘 따라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전 같지 않다고 하여 무조건 그 예전이 좋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역사회라고 하여 고정불변하지 않습니다. 세월 따라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어쩐지 자꾸만 나쁜 쪽으로 내달리는 것 같아 심히 불안합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마치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무중력으로 날고 있는, 그런 느낌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냥 저의 개인적인 느낌일 수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탱해온 토대가 흔들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무엇에 의해 혼란을 느끼는지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 물음을 외면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그 무감각입니다. 그것은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 수준의 영역적 정체성이 요구됩니다. 여기서의 영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단순한 지형이나 ‘자연적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인격과 결부된 공동체로서의 공간까지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우리가 그 공간으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도출해내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 편입돼 있습니다.

정체성은 그가 ‘행하는 바’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나 오해는 금물입니다. ‘제주사람’을 이야기하고, 그 정체성을 거론한다고 하여 ‘나와 남’을 가르자는 심사는 결코 아닙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 속에 공유된 의미를 정립하자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책임지는 태도를 새롭게 하자는 것, 그게 바로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제주에서 제주사람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소리지만, 어쩔 수 없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는 계속 되풀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주사람’의 정체성은 ‘제주에서 태어났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누구라고 주장하는 바에 따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행하는 바’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건 사뭇 윤리적입니다. ‘제주라는 공간’이 바로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고, 먹고 그리고 죽는 생활세계’를 의미한다면, 그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맥락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오늘 제가 상정하는 ‘제주사람’입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우리 주위에는 제주사람이면서 ‘진정으로 제주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육지’에서 들어온 이주민에게도 이 기준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쾌적한 전원생활을 꿈꿔서 왔든,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왔든, 그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질적인 어떤 것을 만나 만들어지는 그 새로운 것’에 대하여, 그리고 ‘낯선 곳에서 전개되는 그 어떤 다른 것’에 대하여, 저는 이 자리에서 토를 달고자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저는 그것이 기꺼이 반길만한 새로운 생성임을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어떤 이상(理想)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여부’에 대해서는,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것 이상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 땅에 뿌리를 내려 살고자 한다면, 이 ‘제주의 땅’에서 ‘이웃과 미래를 공유하겠다’는 생각만큼은 가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이 땅에 책임지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습은 닮기 어렵지만 뜻은 닮기 쉽다”는 말을 믿고자 합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각하는 ‘장소의 감각’이 필요합니다.

저는 ‘고정된 정체성’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비록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다소라도 성찰해 본다면, 그것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어떤 것’임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확실히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단순하지 않습니다. 정체성은 미(美)와 격(格)을 갖춰 창의성으로 발전하게 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어설프게 ‘미적 인식’에 호소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과, 자연을 바라보는 미(美)의식과도 직결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도 저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제주자연의 일부’로 확인하고 있지만, 그것에 취해 망아상태에 지속적으로 빠져 있는 존재는 아니고자 노력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고장에 대한 사랑이 주체할 수 없는 ‘자기애’로 변질될 경우, 일종의 나르시시즘의 마비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그건 ‘자기집착’입니다. 심하면 ‘배타적’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저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만큼 그걸 경계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정체성은 ‘제주사람’과 ‘제주라는 공간’이 하나가 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올바르게 자각하는 ‘장소의 감각’을 되살리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연보존’과 ‘정체성 정립’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제주’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확인하는 것, 그게 바로 정체성의 길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성은 뿌리 내린 곳의 자연이 자기 몸속에 살아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자신이 터 잡아 살아가는 ‘제주라는 공간’과의 자의식적 합일에서 발견됩니다. 그 폭이 넓고 깊을수록 역동적인 사회가 가능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도 풍요해집니다.

우리의 자연을 지켜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 자연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처럼 그건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중산간 난개발을 목숨 걸고 막겠다”는 비장한(?) 소리도 들리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땅을 세계시장에 내놓고, 그리하여 투기를 투자로 미화하는’ 그런 왜곡된 개발정책만큼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 소리에 진정성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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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정체불명이 아닌, 제주사람과 제주자연, 그리고 제주풍토가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지역사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책임지는 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고장은 ‘제주사람’이면서도 ‘진정 제주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제주가 아닌 제주’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척 안타깝습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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