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투표를 잘 하는 것’도 그걸 청산하는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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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4년 6.4 지방선거 시 진행된 사전투표장의 모습. ⓒ제주의소리DB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의 관성

사람은 ‘줄’을 잘 잡아야 합니다. 어떤 줄을 잡느냐에 따라 사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게 이른바 처세술입니다. ‘탄탄한 줄’을 잡은 사람은 능력 이상으로 인정받습니다. 반면에 ‘별 볼일 없는 줄’을 잡은 사람은 그 삶 역시 별 볼일 없이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어떤 무리에 속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못해서 무능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요즘 그런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인연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가 유독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을 따지기를 좋아하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같은 문중이면, 무조건 손을 듭니다. 같은 마을, 같은 학교 출신임이 확인되는 순간, 형 동생이 되고, 누나 오빠가 됩니다. 요즘 같은 선거철엔 그걸 은근히 조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같은 문중이고, 같은 마을 출신이며, 같은 학교를 나왔다면, 이보다 더 기막힌 인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 홀로’ 그걸 등진 사람은 자칫 고립되기 십상입니다.

물론 그걸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출신지역에 대한 애착이 향토애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문중의 형태로 나타나는 가문의식, 그리고 이른바 학벌을 형성하는 동창의식도 같은 집안, 또는 같은 학교를 매개로 삼아 돈독한 정을 나누는데 그친다면, 그것 또한 아름다운 풍속으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그걸 누가 더 뭐라고 하겠습니까?

패거리…이익을 탐하기 위한 일종의 멤버십

그러나 그것이 ‘연줄’을 근거로 한 분파적 행태로 나아갈 경우, 문제는 달라집니다. 출신지역에 대한 애착이 다른 마을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발전되고, 같은 집안, 같은 학교출신임을 들어 편을 가른다면, 그거야말로 ‘너와 나’를 분별하는 또 다른 경계입니다. 그래서 생기는 것이 이른바 ‘패거리’입니다. 그건 ‘이익보장을 위한 일종의 멤버십’으로 작용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탄탄한 줄’이다 싶으면, ‘출신’에 관계없이 그 줄을 잡아 출세하려는 사람들이 한결 같이 꼬여들고, 그리하여 과두(寡頭)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숙명적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패거리’들이 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끼리끼리 작당하여’ 지역사회의 인사와 예산 등 ‘공공자원의 흐름’을 더러 왜곡하고 있다는 소리가 가끔 들리는 것을 보면, 우리고장이라고 예외는 아닌 듯싶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소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게 하나 있습니다. 한 두 사례를 들어 침소봉대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지만, 그런 지적이 과장(誇張)이라는 이유로 무시될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야만성은 독버섯처럼 자라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끼리끼리’ 편을 나누는 행태야말로 지역사회의 폐쇄성과 부패의 온상입니다. 온갖 협잡의 탯줄입니다. 그렇습니다. 명목적인 이유야 어떻든, 패거리는 이익을 기대하며 만들어진 무리입니다. 그건 음험합니다. 그만큼 일사불란합니다. 거기선 ‘다름’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패거리가 유니폼을 좋아하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어린애들도 마다할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옷으로 차려입고 동질성을 과시합니다. 역시 오해는 금물입니다. 그런 옷으로 차려입었다고 하여, 불경스럽게, 우리 정당들을 패거리로 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패거리 내에서 유리한 조건은 개성이 아니라, 동질성이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상처받은 ‘개인’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개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개성은 거추장스런 것에 불과합니다. 패거리가 판을 치는 곳에선 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좁아집니다. 그래서 패거리는 어느새 ‘전체’로 둔갑합니다. 전체를 우선시하는 ‘전체적 사고(思考)’가 등장합니다. 그게 더 무섭습니다. 전체의 통일을 위해 개인의 특별한 사정쯤은 묵살하여도 좋다는 야만적인 생각이 지역사회를 지배하고, 그것에 포섭되지 않은, 혹은 포섭되기를 거부한 개인은 ‘위험한 존재’로 취급됩니다. 그리하여 지역사회의 ‘별 볼일 없는 무명씨’들은 불행하게도 ‘뿌리 뽑혀도 상관없는’ 그런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흘러갑니다.

집단정서가 형성되는 과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역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용인하는 정서가 ‘집단정서’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여론의 흐름’을 왜곡하여 지배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패거리 의식’이 집단정서로 위장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어쩌다 선거에서 이기면, 마치 점령군처럼 모든 것을 독점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그저 그들이 결정한대로 찍소리 안 하고 소임을 다하기를 강요합니다. 참으로 우울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가능성’은 ‘지역사회의 가능성’과 동일합니다. 그들이 바로 지역사회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른바 ‘전체’를 위해 ‘상처받은 개인’에 주목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상처받은 개인’에게 당신의 어려움은 오로지 당신의 능력 탓이라고 힐난하고, ‘줄을 잘 잡아 잘 나가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의 증거라는 주장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그리하여 ‘개인에 대한 주목’이 낯설고 과잉으로 느껴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전적으로 ‘지금 여기’가 부끄러운 성숙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투표를 잘해야 할 이유

‘더 밝은 지역사회’를 위해 우리의 문화적인 짜임이 과연 ‘패거리를 차단할 만큼 충분히 건강한 것이냐’ 하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발전된 사회일수록 내밀한 영역보다는, 공공영역이 광범위하게 성립돼 있습니다. 그것은 사적인 이익과 공적인 이익을 일관된 안목으로 볼 수 있는 명징화된 공간입니다. 그 공간을 넓혀야 합니다. 공공영역에 대한 공연한 불신과, 그런 명징화된 공간을 ‘끼리끼리’로 대체하려는, 그 구조적 관성을 허물어야 합니다.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타성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영합하려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은 바뀔 가능성이 없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라도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의 타성에 도전하고, 그것이 만들어가는 ‘패거리’에 과감히 맞서야 합니다. 그래서 극히 사적인, 포장 뒤에 가린, 그리고 베일에 덮인 그 음험한 구조를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 역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역사회의 주인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지역문제에서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사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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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그렇습니다. 명징화된 공간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천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말은 이처럼 쉽게 하고 있지만, 감정적 편향, 그리고 ‘수많은 말과 글’들이 만들어내는 환상 속에서 그 실체를 직시하기란 어쩌면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우리가 지금, 그런 패거리가 가능했던 토양에서 벗어날 준비가 돼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더욱 오는 4월 13일에 있을 선거에서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판단에 따라 투표를 잘 해야 합니다. 각종 선거가 패거리의 토양이기 때문입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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