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치솟는 집값’…그건 ‘개발정책’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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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판에서 들리는 ‘집값 이야기’

집을 ‘단순한 구조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집은 그저 비바람으로부터 사람을 지켜주는 시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집은 그곳에 살고 있는 가족의 ‘친밀한 공간’입니다. 그때 집은 보금자리가 됩니다. 거주자와 집이 만들어가는 보이지 않은 맥락을 감안하면, 그건 당연합니다. 역시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나섭니다. 혹자는 그걸 ‘거룩한 순간’으로 표현합니다. 집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 ‘존재가 탄생하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집이 호화롭든 초라하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저는 아직도 ‘자기 집’을 갖게 된 순간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모두가 ‘자기 집’을 갖고자 하지만, 그건 쉽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의 불행입니다. 집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 좋은 곳’을 결정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역시 ‘정주의 터’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결정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공급과 수요의 왜곡

집은 ‘집 없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게 사회정의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건 각종 통계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총 주택수를 가구수와 대비시켜 계산하는 이른바 주택보급률이 이미 2014년말 기준 111%인데도, 자기 집에 사는 자가비율은 56.2%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반 가까이 ‘남의 집’에서 산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것은 ‘필요에 따라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니는’ 세태의 반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건 한 명의 사람이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곳이 바로 ‘부동산으로 불로소득을 얻는 사람들’과, ‘100%넘는 주택보급률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이 없어 신구간이면 여기저기로 옮겨 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현장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현실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왜 그런지’를 치열하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부동산 문제’와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데 있습니다. 100%넘는 우리의 주택보급률이 말해주듯, ‘치솟는 집값’이 반드시 일어나야 할 필연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 아닌, 다른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지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발정책’입니다.

반성은 ‘돌이켜 생각하는 일’

오늘의 ‘치솟는 집값’은 우리의 ‘개발정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쩌면 제가 너무 어둡게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땅덩어리는 넓지 않은데, 그것을 대외시장에 내놓아 양적팽창을 추구하고, 그리하여 개발에 대한 환상이 생기고, 그래서 부동산 거품은 술잔 속의 맥주처럼 부풀어 오르고….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습니다. 그것을 의도했든 아니든, 결과는 마찬가집니다. 우리고장의 신규주택수요 중 40%가 ‘투기수요’라는 통계에서 그것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주의소리 3월10일, '제주신규주택 수요1만6000호 중…') 그건 절망입니다.

우리의 ‘개발정책’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과연 우리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건 이미 진부한 주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성의 정도에 따라 그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깊이가 깊어지기도 하고, 천박해지기도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그 과제를 한시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반성’은 도덕적 의미에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오늘의 문제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통렬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성’은 쉽게 말하면 ‘돌이켜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만큼 냉철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뜻도 됩니다. 개발을 반추하는 것이 식상하다고 하여 반성을 포기하는 순간, 지금 우리의 ‘치솟는 집값’ 문제가 그렇듯, 개발의 부작용에 사로잡혀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그건 또 다른 불행입니다.

거품이 꺼지고 난 뒤

부동산을 매개로 외래자본이 들어오면 좋을 것 같지만, 그것도 꼭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은 그저 이윤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그것은 부동의 존재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리하여 한 곳에 정주하고 싶은 사람들의 꿈을 조롱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에 덩달아 꼭두각시 춤을 추고 있는지 모릅니다. “집이 삶의 터전임을 포기하고, 부동산이라는 말로 포장되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마저 교환가치에 포섭되고 만다”는 말이 실감 있게 들리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본이 이윤을 쫓아 옮겨 다닐수록, 거주의 터전에선 그것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삶의 터전이 개발지역에 포함된 순간, 추가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표현이 좀 거칠지만, 일종의 디아스포라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정주의 조건을 갖춘 ‘집 있는 사람들’도 집을 삶의 터전이 아닌, 투자가치를 지닌 부동산으로 이해하는 한, 유랑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환상은 깨지게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이 거품도 꺼지게 마련입니다. 그 뒤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윤을 쫓아 들어온 자본은 별 볼일 없다 싶으면, 썰물처럼 빠져 나갑니다. 그럴 경우, 부동산 가치는 곤두박질치고, 지역사회는 또 다른 어려움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걸 지역주민들이 고스란히 떠맡게 됩니다. 집 없이 살아온 것도 서러운데, 그 어려움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우리고장의 가계대출 증가율이 전국 최고라는 대목에 이르면, 그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제주의소리 3월24일, '가계 빚 10조 돌파 초읽기')

공동체의식을 위하여

‘택지개발’은 차선입니다. 그건 자칫 ‘난개발’을 부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투기수요’를 차단해야 합니다. ‘공동체의식’을 위해서도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게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모르지만, 정주의 가능성이 자본에 의해 좌우될 경우, 거기에선 공동체의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호혜적인 이웃은 ‘한 곳에 터 잡아 사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나그네끼리는 혹 낭만을 나눌 수 있을지는 모르나, 원래 서로가 관심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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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부동산 가치의 동향으로 정주의 여부를 결정하는 지역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회는 오직 부동산 가치의 상승이 예상되는 기간 동안만 의미를 지닙니다. 부동산 가치 따라 재빨리 다른 지역으로 떠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에겐 지역의 공동체의식은 그저 거추장스런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지역사회는 천박해집니다. ‘치솟는 집값’을 계기로 이 선거철에 다시 한 번 우리의 ‘개발정책’을 되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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