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29) 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 서영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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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

벨 훅스는 필명이고 본명은 글로리아 진 왓킨스(Gloria Jean Watkins)다. 필명을 의도적으로 소문자로 사용해 표기한 것이 인상적이다.
벨 훅스의 말처럼 페미니즘은 흔히 ‘남자들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상징한다. 페미니즘의 핵심은 ‘남성’과 동등한 지위와 대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비판정신을 버리고, 그리고 수많은 자매들의 처지를 무시한 채 ‘남성들의 세상’에서 경력을 쌓고 특권을 누리는 소수의 여성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다. 여성해방의 전사처럼 말하지만 여성의 얼굴을 한 남성성의 변종을 만들어 내는 잘 나가는 여성들에게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페미니즘이란 고작해야 가부장제를 용인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추구하기 위해 열등한 지위를 가진 자매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일 뿐이다.(98쪽) 하지만 이건 페미니즘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페미니즘 ‘운동’이 추구하는 것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안에서 동등한 지위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그리고 다양한 성차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들의 의식을 짓눌러 불필요한 의무감과 박탈감에 시달리게 하는 가부장제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벨 훅스가 『행복한 페미니즘』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바로 이것이다. 

“가부장제적 남성성은 남성들에게 그들의 존재감각과 정체성,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타인들을 지배하는 능력에 있다고 가르친다. 변화를 위하여 남성들은 마땅히 지구에 대한, 권력 없는 남성들에 대한,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남성 지배를 비판하고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페미니즘운동가들]은 페미니스트 남성성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 또한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156쪽)

물론 벨 훅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페미니즘 운동이 이러한 비전을 명확하게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주장한 여성해방은 남성해방의 반대쪽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남성들을 가두고 있는 가부장제와 호전적이고 위계적인 남성우월주의를 해체함으로써 남성을 해방하는 운동인 것이다. 

또 하나의 오해는 페미니즘이 여성을 피해자로만 설정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적대감을 보이는 수많은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기도 하다. 하지만 벨 훅스가 강조하듯이 여성도 가해자일 수 있다. 또 다른 여성에게,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그래서 “자기 내면의 성차별주의와 직면하지 않은 채 페미니스트의 깃발을 치켜든 여자들은 종종 다른 여자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페미니즘의 대의를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37쪽) 

페미니즘은 반남성주의가 아니라 반성차별주의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차별주의에 반대한다. 그리고 그 차별의 의식은 가부장제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사회적 투쟁 없이는 사라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현실의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이 이러한 생각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벨 훅스가 찾아낸 기본정신은 뭇 남성들이 생각하는 그런 얄팍한 생각은 아닌 것이다.   

페미니즘을 왜곡하고 여성들의 이기주의로 몰아가는 것 자체가 남성들이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이렇게 보면 여성들을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로 몰아가고 열등한 존재로 간주했던 남성적인 ‘이성의 힘’은 처음부터 허위적이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권력이 불러준 ‘남성’이라는 이름에 부착된 ‘허구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해방의 메시지’에 적대적으로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배우자와 자녀들 사이의 동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남성을 자유롭게 해 준다. 하지만 4-50대 상당수의 ‘가부장’은 가장으로서의 권위에 집착하고 그것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남성들을 불행하게 하는가? 여성들의 도전일까, 아니면 권위에 집착하는 스스로일까?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의 몇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 영화의 배경은 영어 표현 그대로 여성참정권운동가들의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13년 영국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정권은 그리 대단한 요구가 아니다. 어쩌면 그때도 대단한 요구가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남성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영국의 남성들[그리고 많은 여성들도]은 참정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을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불순세력으로 규정한다.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협박하고 가둔다. 그런데 영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남성들이 여성들의 참정권요구와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동원했던 폭력을 두려워했던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서프러제트들이 여성에게 ‘허용된’ 자리를 넘어섬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녀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처럼 보인다. 그 두려움은 ‘여성’에 대한 두려움, ‘여성이 행사하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녀들의 ‘방종’을 통제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 지도 모른다. 두렵다기보다는 불쾌하고 화가 났던 것은 아닐까?

2016년의 한국은 어떨까? 수년 전 서울 지하철 독립문 역 길가에 걸려 있던 현수막을 떠올려 본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수막에 써진 내용은 ‘민족의 성지에 정신대기념관이 웬 말이냐?’였다. 사실 이런 주장이 공적인 장소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의 성차별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이 상징하는 것은 여성은 그 자체로 인격을 가지는 주체가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이며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한국남성’이 아닌 ‘일본남성’에게 ‘능욕당한 여성들’은 숨겨야 할 치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이 남녀평등을 조사하는 각종 국제 지표에서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정도의 평등의식을 가진 한국의 남성들이 ‘남성해방’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남녀평등은 이미 충분히, 아니 과도하게 실현되었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 사회의 산물인 왜곡된 일부 여성상을 ‘된장녀’, ‘김치녀’라고 경멸하면서 그것을 페미니즘과 등치시키는 비합리적인 언동도 불사한다. 페미*이라는 욕설이 사이버공간에서 일상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된장녀’와 ‘김치녀’와 동일시된 페미니즘은 1913년 영국에서처럼 아버지들이, 남편들이 허용한 여성의 행동과 언어규범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를 내면화한 한국의 뭇 남성들을 불편하게 하게 한다. 불쾌하고 언짢은 것이다. 여성이 여성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한국의 남성우월주의는 여성에게 정형화된 여성성을 투사하고 성적대상으로서의 아름다움만을 강요하면서도 여성의 권리가 충분히, 아니 과도하게 보장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가부장적 한국사회의 민낯이다. 그리고 가부장제가 강요한 정형화된 여성성을 생존의 도구로 활용하는 여성은 경멸한다. 페미니즘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변화시키자는 운동이다. 그런데 가부장적 남성들은 이 모든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협소한 여성성과 가부장적 시각에서 페미니즘운동을 재단한다.   

영화 <서프러제트>가 던지는 또 하나의 쟁점은 당시 여성들이 사용했던 ‘폭력’이다. 여성들은 상점에 돌을 던지고 피켓 시위를 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그것에 비하면 폭력이라고 할 수도 없는 여성들의 몸짓들이 있었지만 언론 보도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체통에 폭탄을 넣어 터트린다.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절박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래도 주목받지 못한다.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왕의 말이 출전하는 더비경마장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이건 실화다. 영화에서 주인공 모드에게 ‘굴복하면 안 돼, 투쟁을 멈추지 마’(Never surrender, Don't give up the fight)라는 말을 남기고 달리는 경주마 사이로 뛰어든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의 실화.

우리는 페미니즘의 주장을 얼마나 귀 기울여 들었을까? 답은 명확하다. 듣지 않았다. 소리 높여 성차별 반대를 외치는 여성들은 남성이 허용한 여성의 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었고 그래서 무시되었다. 사소한 걸 가지고 트집잡고 생떼 쓰는 집단으로 매도되었기에 무시되었다. 이미 다 실현된(부분적으로, 그리고 말과 제도로만) 당연한 것을 반복하는 귀찮은 존재들이었기에 묵살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남성들이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언어,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언어를 뒤집어 남성을 향해 던진 ‘메갈리아’라는 사이트는 언론과 남성들의 주목을 받았다. 왜일까? 페미니즘의 목소리는 무시하면 그만이다. 귀찮기는 하지만 불편한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정도’로 경멸과 무시의 말을 날려주면 그만이다. 그런데 ‘메갈리아’는 불편하다. ‘메갈리아’에 격하게 반응하는 일부 남성들의 감정상태는 한 마디로 ‘감히!!’이다. 여성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과 표현을 사용하다니.

한국의 전형적인 남자들은 <서프러제트>의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에게 그건 100년 전이고 우리는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는데 왜 그렇게 ‘난리를 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메갈리아’가 자기들의 모습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남성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메갈리아’가 그런 언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벨 훅스의 지적처럼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하는 남성혐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행복한 페미니즘』의 영어 제목처럼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Feminism is for everybody)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 한국의 조건에서 메갈리아는 스스로 ‘투쟁수단’을 선택한 것이다. 우체통에 폭탄을 넣은 서프러제트들처럼, 더비경마장에 뛰어든 에밀리 데이비드슨처럼. 왜냐고? 한국사회는 철저하게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메갈리아’는 충분히 자기 역할을 했다.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남성들의 귀에 들리게 했기 때문이다. 논쟁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단지 출발에 불과하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몫이다.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어떻게 공론의 장에서 논의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삼아야 하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문제다. 진보정당을 표방하면서 성차별주의와 표현의 자유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어떤 정당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메갈리아’가 우리에게 준 기회를 외면하면서 ‘진보’를 표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한국의 남성성이 얼마나 단순 논리에 빠져 세상을 읽지 못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은 ‘메갈리아’와 ‘일베’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다. 그건 <서프러제트>에서 모드가 일하는 세탁공장 사장이 일상적으로 자행하는 성폭력과 이에 저항해서 모드가 뜨거운 다리미로 그의 손을 내리찍은 폭력을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영화를 보고 그걸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경우에 흔히 사용하는 말은 ‘대책이 없다’이다. 제발 ‘대책 없는’ 남자들은 되지 말자!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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