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17)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개관 이후의 문제들

저지예술인마을에 새로운 미술관이 생겼다. 물방울 작가로 알려진 김창열 화가의 미술관이다. 자신의 미술관 개막을 보고 김창열 작가는 ‘못나서 40년간 물방울만 그렸다’며 그에 대한 보상 같아 기쁘다고 했다. 마을주민부터 국회의원까지 무수한 사람이 모인 개막식은 국내외에 이름을 알린 노화가의 업적을 기리고 영구히 기념하는 미술관에 어울릴 만큼 성대했다.
김창열미술관 개관식.jpg
▲ 김창열 미술관 개관식. 사진 양은희.
김창열작가의 미술관이 제주에 문을 열기까지 사연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논의되곤 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의 모친이 묻힌 양평군에서도 검토한 바 있다. 그러나 1인 작가 미술관 건립과 운영에 투여될 예산에 비해 과연 미술관 사업으로서 타당성이 있는지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재정적자는 다수의 지방자치단체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양평을 뒤로하고 제주가 다른 후보지로 떠올랐다. 6.25때 경찰 신분으로 1년 반 정도 살았다는 인연 덕분이었다. 가족과 함께 6. 25때 왔던 이중섭 화가처럼 그도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미술관 건립이 확정된 지 몇 년, 92억을 들인 미술관이 드디어 결실을 본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은 많은 유료 관람객을 확보하고 재정적자를 피할 수 있을까이다. 작품이 많은 것도 아닌데 명예관장과 헌신적인 큐레이터, 그리고 전략적으로 이중섭 거리를 만들며 대처한 서귀포시 덕분에 어느새 해마다 수십만이 찾아오는 서귀포의 이중섭미술관처럼 그것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작가가 직접 엄선한 대표작을 보유한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은 그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에 오는 관광객이 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가능할 것도 같다.     

사실 입장객 수나 재정적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김창열미술관은 살아있는 유명 예술가가 작품을 기증할 때 미술관을 지어준다는 선례를 만들었다. 앞으로도 ‘훌륭한’ 예술가의 작품 기증이 있을 때마다 미술관을 약속하고 지어야 할까? 제주도는 그럴 수 있는 재정적 여력이 될까? 그리고 선정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유명 예술가인가? ‘훌륭한’ 예술가인가? ‘훌륭한’과 ‘유명한’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살아있는 작가의 미술관이라는 선례는 미술관을 꿈꾸는 다른 예술가들에게 공평한 일인가? 

한국에서의 근현대미술의 역사는 길지 않아서 아직도 많은 대가들이 생존해 있다. 대부분 자신들의 미술관을 꿈꾼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매우 소수이다. 꿈을 이룬 경우는 대부분 자신의 작품을 팔고 지인과 컬렉터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했다. 나머지 다수는 차마 국민의 세금에 기대기가 부담스러워서, 또는 지역 작가들의 견제가 심해서,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되지 못한 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한 사례이다. 몇 년 전 살아있는 한 유명 예술가가 1천점이 넘는 작업과 자료를 인천시에 기증하고 미술관을 짓기로 MOU를 체결한 적이 있다. 그리나 ‘인천시립00미술관’을 지으려는 계획은 지역작가들의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 인천과 연고가 없다는 이유와 시립미술관도 없는 데 1인 작가 미술관은 순서가 아니라는 의견 때문이었다. 당시 지역문화계의 저항이 계속되자 결국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렇듯 살아있는 예술가의 미술관을 짓는 일은 명분과 다수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다.

그나마 명분도 서고 동의도 구할 수 있는 경우는 바로 사망 후 유족이 발로 뛰며 미술관을 성사시키는 경우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은 아까운 작품을 팔며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구상하며 남편이 사망한 지 20년이 다된  1990년대 초 환기미술관을 열었다. 한국 최초로 민간주도로 건립된 1인 작가 미술관이다. 여러 사업이 필요한 시, 군 등 지방자치단체의 이해관계와 예술가 유족의 의사가 맞아서 성사된 경우도 있다. 최근 문을 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등이 그런 경우이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김창열 작가가 오랫동안 활동해온 파리에 피카소 미술관이 있다. 피카소가 누구인가. 스페인 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하며 입체파를 선도했고 20세기 내내 최고의 예술가로 예우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으며, 김환기를 비롯한 다수의 한국 작가도 존경하던 예술가였다. 그런 피카소의 미술관도 그가 사망한 지 12년이 지난 1985년에야 문을 열었다. 그러나 파리시는 치밀했다. 일찌감치 1960년대에 법을 만들어 예술가의 가족이 작품을 유산이나 증여로 받을 경우 그에 대한 세금을 작품으로 낼 수 있게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리고 피카소 생전부터 조금씩 가족으로부터 작품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후 다수의 기증을 거듭하며 수천 점의 작품과 자료를 모은 후 미술관을 개관한 것이다.

피카소 미술관, 파리. 줄을 서서 기다리는 방문객들.JPG
▲ 줄을 서서 피카소미술관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들.
현재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은 예약을 하지 않고 갔다가는 몇 시간씩 문 앞에서 줄을 서서 표를 구해야 한다. 미술관 내의 원활한 관람과 이동을 위해 일정 수 이상이 되면 입장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도시 파리답게 성공적인 미술관 모델을 만든 것이다.  

제주에도 피카소 미술관의 사례처럼 행정기관이 앞서서 작품을 확보하고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미술관 건립 기준을 마련할 때이다.     

▲ 필자 양은희는...

169972_193146_2352.jpg
중고교 시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영어교육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예술과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까지 공부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뒤 서울, 뉴욕 등 세계를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동안 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프로젝트 매니저, 교수 등 미술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역학관계를 체험하고 연구하고 있다. 11년간 체류한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조명한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를 저술했으며, 『개념미술』(2007)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를 돌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고향을 향해 있었다. 특히 요즘 문화예술의 섬으로 떠오르는 고향 제주를 주목하고 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글로벌 시대의 제주의 문화예술 비전을 고민하는 일은 또다른 고향사랑의 시작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