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돈이 곧 실력’이 되는 나라는 지옥보다 못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

사상최악의 대선후보들

미국 대선이 뜨겁다. 하지만 공화당 트럼프 후보와 민주당 힐러리 후보 간 대결로 압축되는 2016년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미래를 위한 정책은 실종되고 성추문과 비방만 난무하는 사상 최악의 추악한 선거라는 비판이 거세다. 시대착오적인 극우적 성향에다 대통령후보라기엔 수준미달의 비상식적인 막말과 기행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 후보.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패권주의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국제적 갈등이 극심해지고 있는 미국과 세계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정치인들과 한 치의 차별성도 찾을 수 없는 힐러리 후보. “둘 중 누가 대통령이 되느니 차라리 지구가 멸망하는 게 낫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플라톤이 설파했던 철인(哲人)의 덕목이 아니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이미지만으로 지도자를 뽑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한계가 온 것일까.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제도의 현실은 선(善)은 전무하고 최악과 차악 중 차악을 택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일상화됐다. 인류가 만든 모든 정치체제들 중 최고선으로 칭송되던 민주주의가 급기야 ‘우중(愚衆)정치’가 돼버린 느낌이다. 정보화시대에서 정치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을 독점하는 언론과 미디어가 잘못일까. 아니면 언론들이 조작한 정치인들의 허상을 믿는 국민들의 ‘우중성(愚衆性)‘이 문제일까.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체제로 여겼던 미국마저 선거 때마다 우중정치의 늪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면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역시 미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공화당 대선후보인 트럼프가 음담패설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을 때 미국 정계와 언론들이 보여줬던 자세는 미국에는 아직도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토양이 살아있음을 확인케 해준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천명하며 그와 정치적 궤를 같이 했던 보수언론들도 공정한 사실보도를 통해 그의 도덕성과 자질을 검증하는 데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 결과 트럼프가 맞서야 하는 상황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게 미국 주요방송사인 CNN이 주요 표제로 뽑아놓은 “Can Trump save Trump?”라는 글귀일 것이다. 직역하면 “트럼프가 자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로 풀이되는 이 표제는 본문에서는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은 트럼프 자신 외에 아무도 없다”는 문맥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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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와 클린턴의 TV대선 토론 모습. 사진 출처=오마이뉴스. ⓒ제주의소리

우중정치의 경계선상에 위태로이 서 있는 미국도 결국은 정치인의 개인적인 문제를 그 자신에게 맡김으로써 스스로 난국을 헤쳐 나가는 과정 속에서 국가 최고책임자로서의 최소한의 역량과 자질을 입증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이러한 모습은 아무리 겉모습만이 중시되는 이미지 시대라 하더라도 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언론과 미디어 그리고 여론조사기관이 덧칠한 정치인들의 화려한 ‘화장빨’을 벗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마다 선거 때는 권력의 냄새만 쫓아다니는 언론들에 의해 분에 넘치는 분칠을 하고 있다가 권력의 힘이 빠지는 집권 말기를 달려갈수록 하나같이 추악한 민낯들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미국의 사례는 그나마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최고권력의 소울메이트

지금 우리가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국정의 총체적 난맥상은 대선전부터 그의 자질과 도덕성을 제대로 검증하는 과정이 없으면, 권력 분산과 견제를 통해 대통령의 권력남용에 제동을 걸기 위한 모든 법적, 제도적 장치들은 완전히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케 해준다. 요즘 들어 속속 사실들로 밝혀지고 있는 현 정권의 이른바 비선실세의 각종 권력농단 의혹들만 봐도 그렇다. 현 최고권력 뒤에 3-40년 전 그분과 각별히 가까웠던 어느 사이비 교주의 망령이 어른거린다는 경고는 일찍이 그분의 소속정당의 대선후보 경선석상에서 상대후보의 입에서도 직접 나왔던 말이다. 그러나 언론들과 추종자들이 외면하고 ‘묻지마‘ 투표가 횡행하는 사이 중대한 의혹은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정보화시대의 불편한 진실은 언론에 의해 뉴스로 다뤄지지 않는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돼버린다는 점이다.

권력자의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하는 일을 기피한 결과는 ‘호미로 막을 일이 이제는 가래로도 막지 못할’ 엄청난 문제로 커져버렸다. 최고권력의 꿈을 이룬 건 대통령이 아니라 사이비 교주의 대를 이어 그분의 ‘영적 동반자’ 내지 ‘소울 메이트(soul mate)’가 된 그의 다섯 번 째 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국민의 위임이 아니라 대통령과의 사적 관계에서 나오는 그녀의 ‘호가호위’ 권력은 거침이 없었다. 국가의 주축을 이루는 정계, 재계, 대학, 문화계, 체육계 등 주요 부문들의 기본 질서가 그녀의 한낱 ‘그림자 권력’에 의해 철저히 기망을 당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세상을 흔드는 쥐 한 마리로 인해 땅바닥으로 떨어진 국가기관들과 민간조직들의 공신력은 상당기간 해당기관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일반 국민들에게는 불신에서 나오는 피해의식으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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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마친 뒤 '#나와라_최순실' '#그런데_최순실은' '백남기 농민 부검 대신 사과' 손피켓을 든 야당과 무소속 의원들 앞을 지나고 있다. 사진 출처=오마이뉴스.

무너지는 난공불락의 성벽

그러나 책임져야 할 자들은 여전히 책임 불감증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림자 권력의 빌미가 됐던 대통령은 아직도 국민들의 들끓는 분노도 눈치 채지 못한 듯 예의 ‘유체이탈’ 식 변명에 급급하고 있다. 그리고 평소 국무회의에서 한 마디 발언도 못하고 대통령의 말씀만 받아 적던 관계부처들과 수사기관은 사건을 엄중히 조사하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없이 대통령의 입과 시선의 방향만 쳐다본다. 또 정권 초기 용비어천가만 불러대던 수구언론들의 때늦은 보도는 차라리 “그릇 깨진 후 물 담기”에 불과한 괜한 호들갑에 가깝다.

이들을 보면 역시나 “중이 제 머리 깎지 못함”을 다시 확인케 해준다. 오히려 여전히 종북몰이의 불씨를 지피며 권력에 불리한 현안에 물 타기하며 여론을 오도하고 있다. 내년 대선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다. 지도층이 무능하고 언론들이 길들여져 민주주의를 위한 공정한
▲ 김헌범 교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검증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한 지금, 믿을 것은 국민들의 깨어있는 의식뿐이다. 최고권력과의 남다른 관계로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았던 비선실세의 각종 비리들과 비행들이 하나, 둘 씩 드러난 계기도 연약하게만 보였던 이대생들의 옹골찬 용기에서 시작됐다.

마지막 보루인 국민들마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주전자 속 끓는 물에 영문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 신세가 되지 않을까. 인간보다 말을 사랑한 비선실세의 외동딸의 말처럼 “돈이 곧 실력”이 되는 지옥보다 못한 나라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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