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35)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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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 샤머니즘의 부활

언젠가 전철을 타기 위해 전철역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어떤 중년 남성이 앞에서 다가와서 내게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정확한 문장은 생각나지 않지만 대략 “선생님은 남다른 기운이 있으시고 복이 넘치는 인상이네요.” 정도의 말이었다. 그 말이 너무나도 진실하게 느껴져서 잠시 시간을 내어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약속 시간이 촉박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인상이 훌륭한가 하는 우쭐한 느낌은 나중에 아내에게 그 에피소드를 말하는 순간 급속하게 사라졌다. 예전에 흔히 듣던 “도를 아십니까?”의 최신 버전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을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물론자가 기운이니, 복이니 하는 주술적인 어휘에 그렇게도 쉽게 넘어갔다는 사실이 약간 서글프게 여겨졌다. 나 자신이 여전히 나를 훨씬 능가하는 어떤 힘에 기대지 않고서는 세상사에 대처해 나가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다행인 것은 나의 그와 같은 유약함은 남들에게 그다지 피해를 주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공적인 영역에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일에 대한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런 유약함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예컨대 전쟁을 벌이는 것이 옳으냐, 그렇지 않으냐와 같은 일을 결정할 때 ‘기운’이니 ‘복’이니 하는 단어의 힘에 기대어 어떤 결정을 내린다면 수 천 만 명의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 근대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그런 위험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장치를 마련했다고 믿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합리적인 이유에 의해서 돌아간다고 생각해 왔다.

대통령이 정성을 다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말할 때에도, 역사를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고 말할 때에도, 그런 어휘는 그저 하나의 은유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우리가 가진 기존의 상식을 버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지는듯하여 불안감이 커진다. ‘우주’니 ‘혼’이니 하는 단어들이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매우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어휘였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 전임대통령은 우리나라를 기독교의 신에게 바치더니 현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정체모를 어떤 신에게 바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이리저리 바쳐지는 우리 국민들이 불쌍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샤머니즘의 국가로 조롱을 당하고 있는 신세가 되었지만, 다른 나라들도 따지고 보면 우리보다 많이 나아가지 못했다. 이슬람이 근본주의로 회귀하면서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 그리고 소위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한다고 하면서 21세기형 십자군 전쟁을 벌이고 있는 서구 국가들의 상황도 종교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이성의 힘을 통해 개명된 세상에 살게 되었다고 하는 계몽주의적인 신념이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 아니었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정신은 아직 자신이 우연적인 존재임을 받아들일 만큼 자립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인간은 여전히 초월적인 어떤 힘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환상이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2. 종교와 신경증

인간이 그다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프로이트만큼 잘 서술하고 있는 사상가도 참기 힘들다. 아니 오히려 프로이트는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주의 한 구석에 우연히 존재하게 된 인간이라는 이 생물종은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 자기 삶의 목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생존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욕망에 의지하여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필멸의 존재로서의 그는 자신의 모든 욕망이 세상에 의해 부정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불안과 염려, 그리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욕망이다. 

이런 하찮은 존재가 지구상에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었던 원인을 프로이트는 종교의 발명에서 찾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는 여러 문명의 바탕이 됨으로써 인간의 원시적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주었다. 도덕이나 양심은 모두 종교의 발명품이다. 그와 같은 장치가 없었다면 인류는 일찌감치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종교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유태인인 프로이트는 뜻밖에도 유태교와 기독교 모두 불경하다고 여길 만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출애급기에 등장하는 모세는 유태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모세가 다신교가 퍼져있던 이집트에서 일신교를 믿었던 인물이었으며,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유태인들을 끌고 나와 유태인들에게 야훼를 유일신으로 모시는 종교를 선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심리학적 가정으로서 역사적으로 증명될 만한 주장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이런 가정을 세우는 이유는 모든 종교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강에 버려졌다가 다시 건져져 키워졌다는 모세 신화는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신화의 유형이다. 종교는 동일한 인간의 심리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신화를 만들어내고 최종적으로는 추상적인 유일신교로 발전한다. 기독교 및 유태교와 같은 유일신교의 뿌리는 결국 샤머니즘적인 원시 종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진화생물학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는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종교의 기원을 살피려면 원시인들의 생활 방식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그가 주목하는 중요한 사건은 원시인 무리에서 일어난 부친살해의 사건이다. 강력한 우두머리가 여성을 독점한 이 무리에서 추방당한 아들들은 힘을 합해 아버지를 무너뜨리고 산 채로 먹어버린다. 이들이 이러한 일을 벌인 것은 욕망에 따른 것이었지만 사건이 벌어지고 나자 이들의 내면에는 묘한 감정이 싹튼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은 살해의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인 충동을 억제하기로 약속하고 서로 반드시 지켜야할 의무조항을 만든다. 그것이 근친상간에 대한 터부와 족외혼속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대용물로서 토템을 만들어낸다. 토템은 그들의 수호령이자 제의를 통해 먹어버려야 할 대상이 된다. 이 토템이 최초의 신이었던 셈이다. 이런 신은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점차 추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간다. 처음에는 동물의 자리 인격신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는 모성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남성신이 등장하는 식이다. 

결국 이런 신은 기독교의 유일신에 이르러 가장 추상적인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을 아버지라고 칭하는 것, 구세주의 피와 살을 먹는 기독교의 성찬식 의례는 토템 향연의 반복이다. 원죄 의식은 부친살해에 대한 기억에 토대를 둔다. 

원죄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자신이 신의 뜻에서 벗어난 삶을 살까봐 늘 염려하는 종교인의 태도는 전형적인 신경증의 증상과 유사하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 유사성은 바로 부친살해에서 비롯된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신경증을 보이는 사람은 지나친 애착과 무의식적인 적대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제정일치가 행해지는 원시 부족의 경우 이 양가감정은 자신들의 우두머리 즉 왕을 향해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프레이저의 인류학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선거로 왕을 뽑는, 시에라리온의 미개인 티메 족은 대관식 전날 밤에 왕을 매질하는 권리를 지닌다. 법이 허용한 이 특권을 이들이 어찌나 철저하게 누리는지, 대관식 전날 밤에 늘씬하게 얻어맞은 재수 없는 왕은 왕좌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추장들이 어떤 사람에게 앙심을 품고 제거할 마음을 먹으면 그 사람을 왕으로 선출한다.”(97쪽)

사람들은 어쩌자고 저 불행한 여인을 왕으로 뽑은 것일까? 저들의 맹목적이라고 할 만한 애착 속에서 무의식적인 적대감을 읽어낸다면 그것은 지나친 망상일까? 어차피 종교의 시대라면 이런 몰상식한 생각도 허용될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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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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