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37) 힐러리 웨인라이트 『국가를 되찾자 - 대중 민주주의의 실험실을 찾아가는 현장 탐사기』/서영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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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러리 웨인라이트 『국가를 되찾자 - 대중 민주주의의 실험실을 찾아가는 현장 탐사기』김현우 옮김. 이매진.
국가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결코 전부는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어떤 나라의 ‘국민’이다. 하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에 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무수히 많은 불만과 갈등이 국가에서 비롯되는데도 그 성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놀라움은 ‘국민’들의 순응 때문이 아니라 그런 ‘당연함’을 만들어내는 국가권력의 힘에 대한 것이다. 2016년 한국의 국민들은 최순실이라는 개인의 ‘국정농단’에 대해 분노하고 있지만 세계 곳곳에서, 심지어는 민주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서유럽에서조차 국가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권력 독점과 농단의 싸움터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우리는 국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미국의 근본적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과세권조차 의심한다. 티파티(Tea Party) 당원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연방정부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의 계급 착취적 성격을 비판해 왔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힘에 의해 파괴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를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권력의 핵심으로 지목했다. 그들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만들어 내는 ‘결사들의 연방’을 꿈꾼다. 국가를 둘러싼 이런 논란은 국가가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매끄럽게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국가가 학술적 논쟁의 중심이었던 1970년대에 몇몇 좌파 이론가들이 제시한 것처럼 국가는 계급들 간의 힘이 응축돼 표현된 장치였다. 끊임없이 존재 자체의 의미 즉 정당성의 근거를 창출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갈등의 한가운데 있는 국가의 통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야 했다. 끊임없는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런 갈등이 구조적인 문제로 치닫는 것을 막아내고 관리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서 기존의 정치체제 안으로 한정시킬 수 있는 철학적 근거와 그것에 기반해 만들어지는 제도를 제시해야 했다. 여러 입장들이 개진되었지만 그 중 가장 세련된 생각은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의 그것이었다. 소위 다두제(polyarchy)로 알려진 그의 생각은 선거를 통한 대의제를 핵심으로 한다. 대다수 국민은 국가의 통치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할 수밖에 없고 위임의 방식은 민주적인 선거라는 것이 핵심 주장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선거가 과연 국민이 가지고 있는 필요(needs)를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가이다. 달은 필요보다는 선호(preference)라는 개념을 더 좋아한다. 그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선호는 투표소의 표로 표현되어 경험적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선거를 통해 대의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다원주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 달의 생각이다. 

달의 주장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불만은 여러 방향에서 제기 될 수 있지만 크게 두 가지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 달의 다두제가 전제로 하고 있는 권력은 사회학자 스티븐 룩스(Steven Lukes)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1차원적이다. 국가는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권력으로 구체화되어 실행되는 장치들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비정상’으로 규정된 위치들로부터 생겨나오는 불만과 저항이 표현될 통로를 봉쇄한다. 계급적 수탈을 노골화한 신자유주의 정부를, 그것의 희생자들인 노동자들과 빈곤층이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수 지배세력의 이해관계를 사회 전체의 것으로 표현해내고 국민들에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우리는 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해 거리에 나선 국민들을 ‘위대하다’고 칭송하면서도 국민이 할 수 있는 건 광장과 거리에 나오는 것뿐이라고 선을 긋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일까?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이 총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이 순간 거리에서 외쳐지는 구호의 결론이 고작 ‘투표합시다!’로 모아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사회가 ‘정상’으로 허용한 것은 기껏해야 룩스가 2차원적이라고 표현한 권력이다. ‘정상’이 좁게 정의되고 협소하게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즉 처음부터 선택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배제된 것, 비결정(non-decision)이라고 표현된 것을 교정하는 개혁적 조치를 제시하는 것이 2차원적 권력이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의 틀 안에 가두고 있다. 국민은 아직도 통치의 대상이며, 대표를 선택하는 데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제공받는 것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은 또 다시 ‘정상’의 경계 안에 은폐된다. 박근혜-최순실의 권력 농단은 ‘비정상’으로 규정되지만 이명박 정권이 합법의 틀 안에서 자행한 권력의 사유화는 여전히 ‘정상’의 범주에 남는다. 1차원적 권력에서 할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우겨대던, 그래서 자본의 힘을 보장해 주었던, 김대중과 노무현을 박근혜의 반대편에 놓음으로써 파괴되어야 할 낡은 권력구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룩스가 말하는 3차원적 권력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깨고 나온 정치적 주체의 형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물론 그의 주장이 이상적인 주체 위치, 즉 권력의 효과로부터 벗어났을 때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 이해관계(objective interest)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설득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돌파구를 제시한다. 조금 길지만 그람시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문제의 사회집단이 비록 맹아적 형태이기는 해도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우연적이고 순간적일망정, 그 집단이 유기적 전체로서 행위 하게 되는 바로 그 때의 행위 속에서 그러한 세계관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집단은 복종과 지적 예속 때문에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집단에게서 빌려 온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빌려 온 세계관을 말로는 긍정하고 또 자신들이 그것을 따른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 세계관은 그들이 ‘평상시’에, 다시 말해서 그들의 행위가 독립적이거나 자율적이지 못하고 복종적․예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에 추종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철학은 정치와 결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더 나아가서 어떤 세계관의 선택이나 그에 대한 비판 또한 정치적인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옥중수고』2권, 거름, 166쪽)
        
그람시는 대중(시민 또는 국민이라고 불리든, 민중 또는 인민이라고 불리든)이 지배적인 세계관(‘정상’)을 수용하지만 ‘행위’와 ‘실천’을 통해, 비록 ‘맹아적기는’ 하지만,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상’을 벗어나는 행위는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정치는 언제나 국가를 중심으로 하지만 원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국가에 가두어질 수 없는 정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힐러리 웨인라이트(Hilary Wainwright)의 『국가를 되찾자』는 정부부처와 의회에 갇힌 협소한 정치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을 정치의 주체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정치, 정치적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녀의 다소 과잉된 낙관주의에 고개를 갸우뚱 할 때도 있지만 국가를 관료와 정치인의 손에 맡길 것이 아니라 지역과 일상을 ‘정치 영역’으로 개척하자는 주장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책의 원제가 Reclaim the State라는 것을 기억하자!)
 
국가는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지배계급의 도구가 아니다. 국가 그 자체는 계급투쟁의 전장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작은 국가’를 내세웠지만 노동자의 임금수준과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시민의 사회적 권리를 축소함으로써 자본의 이윤축적의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시민의 저항은 ‘비정상’으로 낙인찍혀 탄압받았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웨인라이트는 다소 과잉된 낙관주의의 위험을 무릅쓰고 국가 장치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릴라전이 가지는 의미를 끌어내려 한다. 브라질의 포루투 알레그레에서 시작해서, 맨체스터, 루턴, 뉴캐슬까지. 이 사례들은 그녀가 직접 보고 경험했던 사례에 국한되어 있다. 책의 부제처럼 이러한 사례들은 대중민주주의 ‘실험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다시 그람시의 표현을 빌자면 사람들은 지배계급의 세계관 속에 살지만 일상의 실천에서 지속적으로 그것과 마찰을 일으키는 저항적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이게 나라냐?’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이미 ‘정상’으로 정의된 ‘국가’를 은연 중에 인정하는 것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에 의해 ‘비정상’으로 이탈한 국가를 ‘정상’상태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되돌아가야 하는 ‘정상’ 상태는 고작해야 2차원적이다. 권력이 소수의 손에서 다른 소수의 손으로 이전시키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래서 질문은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무엇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어차피 처음부터 국가는 권위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가를 민주화’하는 운동은 단 한순간도 멈출 수 없다. ‘국가를 민주화’하는 운동이 단 한순간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은 국가에 집중되어 있는 자원과 정보를 시민에게 되돌려 주고 그 힘으로 부를 독점하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재벌의 힘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시장을 사회화’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권력의 대상, 통치의 대상을 강요받아왔던 시민을 권력의 주체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대중을 권력주체로 만들기’가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웨인라이트가 권력관계를 역전시키는 핵심어를 ‘지식’과 ‘민주주의’로 설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시장-사회의 관계를 전변시키고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닌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곧 평범한 사람들의 역량(capacities), 정치적 역량이 높아져야 한다. 이것은 개인으로 파편화 되어 있는 시민들이 대중민주주의의 실험들을 통해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자원을 획득하게 되어 자기통치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국가’의 힘을 ‘사회’로 이양시키는 것, 그리고 경제의 목적을 인간다움을 말살하는 이윤추구가 아닌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생산 활동으로 다시 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을 ‘민주주의의 급진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서영표 제주대 교수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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