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레코드> (94) 눈 내리던 겨울밤 / 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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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캐스터가 건조하면서도 다소 아쉬운 목소리로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기 어렵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함박눈처럼 흩날렸다. 어렸을 때는 겨울을 기다렸다. 눈이 내리면 강아지처럼 마냥 좋아 눈 위를 뛰어다녔던 그때. 특히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행운을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점점 그런 기대는 오랜 과거가 되어갔다. <들국화>의 노래 ‘1960년 겨울’에 나오는 ‘성원아, 들어와.’식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와 같은 먼 겨울. 요즘 인기 TV 프로그램 중 하나인 ‘복면가왕’은 블라인드로 노래를 듣고서 노래를 부른 이가 누구인지 맞추는 프로그램이다. 예상 못한 출연자의 의외의 노래 실력 때문에 흥미진진한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그 방송에서 패널로 앉아있는 사람 중에서 유영석과 김현철을 보면 세월이 흘렀음을 느낄 수 있다. 둘의 노래가 먼 겨울처럼 아득해지기 전에 노래를 찾아 듣는다. 둘은 한때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음악가였는데 이제는 예능 프로에서 입을 쩍 벌린 채 놀란 표정으로 리액션을 한다. 그런 광경을 보면 씁쓸하기까지 하다. <푸른하늘>에서 서정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음악을 하던 유영석과 ‘춘천 가는 기차’를 부르던 감수성 짙은 김현철의 시대는 먼 겨울이 되었다. 천재적 음악성을 계속 보장 받을 수 있는 음악 시장 구조나 아티스트에 대한 대접이 충분한 사회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구조 속에서 그들은 음악 프로그램이라는 위안을 삼으면서 놀라는 연기로 자신의 이름을 연명하고 있는 건 아닌지. <패닉>의 이적은 또 어떠한가. <패닉>의 음반은 한국대중음악사에 남을 명반들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이라는 오락 프로그램에 나가 못생긴 캐릭터로 희화되곤 한다. 방송인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웃음을 주는 역할을 하는 점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음악 작업들이 지장을 초래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윤종신은 꾸준히 음악을 만들고는 있지만 개그맨 같은 해학성 때문에 그의 말장난에 더 박수를 보낼 때가 많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상황에 맞게 처세해 가야 하는 걸까. 나만 나이 드는 게 아니라 계절도 늙는다. 아이에겐 어린 겨울. 지금은 서늘하게 늙은 겨울.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를 들으며 계절의 변화를 바람으로 느낀다. 김창완은 ‘시간’이라는 노래에서 앞부분에 긴 내레이션을 한다. 마치 길을 걷다 무릎 아파 주저앉아 구시렁대는 것 같다. 이젠 일기예보에서 많은 눈을 예상하면 출퇴근길을 걱정해야 하는 겨울.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이 그해 가장 큰 궁금한 점이었던 겨울은 너무 멀리 가버렸다. 마이마이에 카세트 테이프를 넣고 <Wham>의 ‘Last Christmas'를 들으며 함박눈을 기다리던 그 풋풋했던 겨울, 다시 올 수 있을까. /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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