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7) 낙숫물은 떨어지던 데 떨어진다
 
 뚝·뚝·뚝·뚝. 
 
비 오는 날이면, 처마 밑에 빗물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바람 잔 날엔 누가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같았다.

낙숫물이란 게 지던 데만 지니, 작은 물방울이 처마 아래다 홈을 팠다. 반복되는 습관의 힘이었다. “먹돌(제주 바닷가에서 나는 단단한 검은 돌)도 똘(ㄸ+아래아+ㄹ)람시민 고망이 난다”(먹돌도 뚫고 있으면 구멍이 난다)는 말을 실감했다. 

온순한 사람은 아잇적부터 순했다. 버릇 좋은 아이를 ‘어진이니 순둥이, 순덕이’라 했다. 쑥쑥 여름 수박 크듯 하라는 뜻 말고도, 어질고 순한 사람으로 자라라는 의미도 녹아 있었다. 

“지신 물은 떨어져난 디 떨어진다”를 곱씹다 보면, 늘 호던 버르쟁이 (노상 하던 버릇) 어디 안 간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조금 융통성 있게 해도 될 것인데 옹고집을 부린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 사람, 이러기도 저러기도 하는 것인데 영 변통이 없구먼.’ 하며 혀를 찬다. 유연성이 없어 보기에 민망하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열 살 버릇 여든 간다 했을까.
  
주기적으로 되풀이하는 식사·수면 따위의 습관은 물론이고, 우리가 오늘에 향수(享受)하는 풍속이니 문화니 하는 넓은 의미의 관습도 실은 습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 한다. 습득(習得)된 결과라는 점에서 선천적인 반응과 구별된다.

습관은 유아기에 형성되면 좋다. 조기(早期)에 행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어릴 적부터 부모의 좋은 모범을 본보며 습관을 길들이면 이상적이다. 학습의 결과나 경험의 반복과 생활체의 욕구충족이 맞아 떨어진다.
  
7%의 미국인만 사용했던 치약이 어떻게 전 세계인의 필수품이 됐을까. 수영의 전설 펠프스는 마리화나를 흡입해 큰 파문을 일으키고도 신기록을 갈아 치우며 올림픽 메달 총 28개를 획득할 수 있었는지.  

간절히 원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의 중심에 습관이 자리해 있는 수가 적지 않다. 왜 우리는 후회할 걸 알면서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지. 일의 깊이에 습관이 한 자리 틀고 앉아 있는 걸 알아야 한다. 그걸 깨닫는 자는 앞으로 나아간다. 진화한다.

“지신 물은 떨어져난 디….” 맞는 말이다. 자연 현상에서 깨닫는 게 인간의 몫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이유가 아닌가.
  
2017 정유(丁酉)년 ‘붉은 닭의 해’를 맞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고 싶다. 

낙숫물은 만날 떨어지는 데로 떨어진다고 으레 그러려니 체념한다면, 그는 숙명론자다. 좋은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숙명론’을 휴지통에 냅다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이 외부의 어떤 초월적 힘에 달렸다고 믿는 게 숙명론이다. 인생의 복 불복(福不福)이 별자리나 사주팔자, 유전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면 숙명론자다. 반복되는 행동이 극적인 변화를 만든다. ‘습관의 힘’이다.
  
문득 아잇적 기억의 갈피에 접어 둔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삼대를 살던 낡은 초가집 텃밭에 퍼렇게 돋아나던 새우리(부추). 처마 밑 낙숫물이 떨어지던 자리에 줄 지어 무성했다. 여름 가뭄에도 이울지 않고 유달리 싱그러웠다. 낙숫물로 흙이 촉촉해 있었다. 자연의 습관이다.
  
이왕 습관을 화두 삼고 있으니, 하나 덧붙이고 싶다. 당신이 창의적 인재가 되고 싶다면, 지금 바로 ‘메모’를 시작하라는 것. 

칸트·니체·정약용·스티브 잡스 등 인류의 위대한 리더들은 모두 메모광(狂)이었다. 메모는 단순한 기억의 보존 장치가 아니다. ‘생각의 반응’이자 ‘창의성의 원천’이다.

말인즉 옳거니, “지신 물은 떨어져난 디 떨어진다.” 그도 습관인 모양.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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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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