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는 나의 그림책’으로 그림책의 재발견에 나섰던 오승주 작가가 다시 고전을 꺼내들었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논어 읽기 시즌2에 맞춰 <제주의소리>에 인문학 함께 읽기 칼럼을 펼쳐놓습니다. 좋은 생각에 힘입어 우리의 행복이 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논어와 동서양 고전의 향연] (1) 좋음에 대한 단순명쾌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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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지은이) | 김재홍 | 강상진 | 이창우 (옮긴이) | 길 | 2011-10-17 | 원제 Ethica Nicomachea

나이를 먹고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전향

저는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로부터 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한 친구가 제게 권한 최초의 철학책이 스피노자의 <에티카>였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는 못해도 사유하기를 좋아했던 제 기질은 철학과 맞았습니다. 알다시피 스피노자는 합리론자입니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등이 이에 속합니다. 그 근원은 플라톤이죠. 제1철학, 제1원리, 이데아, 예정조화론 등 경험세계를 초월한 질서를 강조하는 철학 사조입니다. 경험세계와 감각에 주목하고 미국 민주주의와 현대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은 이와 쌍벽을 이루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딱딱할 것 같아서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사고방식은 귀납적이며 정적(靜的)인 편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룻밤에도 지구를 열 번도 넘게 부쉈다가 다시 만들죠. 공상적인 사고방식은 결혼과 육아라는 도전(?)에 산산조각났습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더 맞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덕은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상식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하고, 경험을 높이 산다는 점입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민하지 않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고 답합니다. 행복을 위한 실천철학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물론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행복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자기계발서의 행복은 목표를 위해서 밤낮 가리지 않고 자유를 희생하고 쟁취한 맛난 과일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내 안에서 행복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하나씩 제거해서 지켜낸 고유한 힘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받았지만 이성을 통해서 지켜낸 나 자신이죠. 자기계발서의 행복은 다분히 공상적이고 비현실적이고 ‘폭력’적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도 된다는 논리는 수많은 불행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내 주위를 불행하게 만들면서 나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겠죠.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계발서의 행복을 의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을 지지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행복을 위한 일상의 실천을 말하는 <논어> ‘옹야 편’

옹(雍)이라는 제자를 칭찬하는 대목부터 시작하는 <논어>의 ‘옹야 편’은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연결시켰습니다. 두 철학의 말이 얼마나 닮았는지 한 구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명예는 우리가 추구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인 것 같다. 명예는 명예를 받는 사람보다 수여하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좋음은 고유한 어떤 것으로서 쉽게 우리에게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믿음직하다. 찬밥에 냉수를 마시며 골목 안 누추한 집에서 살고 있구나. 다른 사람이라면 불평불만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터인데 안회는 아무런 걱정 없이 아주 즐거운 것 같다. 대단하구나, 안회는! - <논어>, 옹야 편

누추한 집에서 살면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회에게 그런 건 상관 없습니다. 자기만의 ‘좋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거요"라고 했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켄 로치 감독)의 대사처럼 아리스토텔레스와 안회는 자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좋음을 어떻게 획득하느냐 이야기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안회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안회는 인(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며 자신의 건강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좋음은 자족(自足)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혼자만을 위한 자족성이 아니라 “부모, 자식,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을 위한 자족성”(니코마코스 윤리학)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회는 위생과 건강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절했고, 스승인 공자를 비탄에 빠지게 했기 때문에 좋음의 뛰어난 경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회는 조선의 산림(山林) 또는 사림(士林)들이 원리주의자처럼 극단적으로 성리학 사상을 추구한 풍토를 만든 책임이 일정 부분 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사회적인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철학이기 때문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본 칼럼의 첫머리에 두고, 다음 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개인과 사회에서 동시에 성취를 이룬다는 유학(儒學)의 핵심 개념인 내성외왕(內聖外王 : 개인적으론 성인이 되고, 대외적으로는 어진 지도자가 된다)을 아리스토텔레스로 말한다면 내성(內聖)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외왕(外王)은 <정치학>입니다.

‘중용’이야말로 제주도가 보여줘야 할 책임과 의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중용(中庸)>이라는 경전의 글쓴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입니다. 중용의 정신은 공자로부터 온 것이죠.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선진편))으로 대표되는 중용의 정신은 <논어> 전편에 흐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철학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절제와 용기, 탁월함과 자유, 정의가 자라나는 토양입니다. 이처럼 행복과 모든 가치 있는 미덕의 원천인 중용을 얻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공자도 그 어려움을 강조했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영원한 도인 중용은 지극한 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도가 민간에서 쇠퇴한지도 오래되었구나. - <논어>, 옹야편

잘못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범할 수 있는 반면, 올곧게 성공하는 것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지나침과 모자람은 악덕에 속하며, 중용은 탁월성에 속하는 것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절제와 용기, 그리고 새로움입니다. 참된 본성과 참된 지혜를 잃어버린 오늘날의 모습으로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죠. 참된 중용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듣는 중용은 기계적 중립이거나 양비론이거나 보신주의의 처세술일 경우가 많으니 또 하나의 극단인 셈입니다.

제주도만큼 극단의 피해를 심하게 겪은 곳이 있을까요? 4.3피해 당시 제주도 전체를 피아(彼我)로 구분하고 아가 아니면 모두 죽여야 한다는 발상.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 상처처럼 남아 있습니다. 해군기지, 제2공항부터 시작해서 관덕정 차 없는 거리까지. 돌아보면 극과 극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이 마치 점령군처럼 폭력적으로 추진하고, 반대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정에서 공동체는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피아로 구분돼 버리고 결국은 파괴되어 갑니다.

저는 언론시민운동을 몇 년 하면서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가와 시민단체가 상대방을 적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선명해지고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명분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떄문입니다. 상대방이 악마에 가까울수록, 상대방이 하는 정책의 가치가 0%에 가까울수록 우리 쪽에는 후원금이 쌓이고 지지자가 늘어납니다. 이것이야말로 선동이며 구태이고 극단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실정(失政)을 거듭했다 하더라도 가치가 0%라면 도입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2공항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것이 전혀 의미 없는 아이디어인가요? 쟁점은 무엇인가요? 매우 여러 가지 토론의 장이 생길 것입니다. 제2공항 자체가 무의미한가에 대한 토론, 필요하다는 걸 전제로 방법론에 대한 토론. 일반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려고 하면 쟁점이 무엇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반대와 뭉개기가 어지럽습니다.

관덕정 차 없는 거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 정책을 접하는 사람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을 만큼 폭력적이기 때문에 토론 자체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야단을 맞아야 하는 건 언론입니다.

저는 언론 종사자들이 말하는 ‘각’이라는 용어가 불편합니다. 한 사안에 대해서 대립구도를 설정해야 한다는 편견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듭니다. 쟁점사안에 대해서 건강한 토론과 연착륙이 가능하도록 성실히 취재하고 극단적인 대립을 막을 수 있게 중계해야 할 언론사가 오히려 무의미한 극한 대립을 부추기는 것은 대한민국 곳곳의 풍경이 될 만큼 만연했습니다.

<논어>에서 말하는 중용의 원칙 중에서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대목은 ‘주급불계부(周急不繼富, <논어> 옹야편)’입니다. 처지가 매우 급한 사람을 도와줘야지 여유 있는 사람의 재산을 늘려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1억원이상 버는 사람과 최소생계비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같은 세율을 적용할 수 없다는 말과 같죠. 어떤 큰 선택을 할 때 이로 인해서 처지가 매우 급해지는 사람은 누구이며, 이미 쌓인 부가 더 크게 쌓일 사람은 누구인지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반드시 살펴봐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중용을 위한 중요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손쉬운 길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극단과 대립이 생기는 까닭은 손쉬운 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해군기지 일이 제주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지역 공동체의 파괴입니다. 심지어 친척이나 동창끼리도 원수가 되게 만든 것은 정부가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손쉬운 길을 선택하던 관습이 이해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토론하는 번거로움을 이긴 것입니다. 이것은 달라져야 합니다.

한 정책에 대해서 구성원들의 대립을 최소화하려면 언론사들이 손쉬운 길을 포기하고 번거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 선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정책을 발표하고 추진하는 힘이 있는 사람들과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들과 대중을 조직해 집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중용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원의 중심을 잡아내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듯이, 각각의 경우마다 중간을 잡아내기란 어려운 법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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