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22) 빙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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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떡. ⓒ 김정숙

제주 향토음식을 말할 때면 빠지지 않는 음식이 ‘빙떡’이다. 얇게 부친 메밀전으로 채 썰어 데친 무를 비잉 말아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음식이 떡의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이다. 맛은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한두 번 먹어보고서는 알 수 없다. 여러 번 먹고 나서야 그 심심하고 담백한 맛의 깊이를 가늠 할 수 있다.

떡들이 얼마나 일취월장 했는가. 다양한 재료, 고물과 고명으로 먹기가 아까울 만큼 맛과 모양이 화려해 졌다. 그 떡들 사이에서 빙떡은 옛 맛과 모양이 그대로다. 크기가 좀 작아졌을 뿐이다. 사실 빙떡은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음식이니 그대로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닐까.

빙떡은 제사나 명절 집안 대소사에 두루 만들어 먹었다. 일가친척집에 큰일이 났을 때는 부조로 만들어 보태는 소박한 정성이기도 했다.

주 재료인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고 생육기간이 짧다. 자연재해로 잃어버린 작물을 대체해주는 제주 섬의 효자작물이기도 하다. 감귤 등 여러 소득 작물에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지금도 제주메밀은 전국 제일의 생산량을 차지한다. 메밀에는 독특한 향이 있다. 껍질을 벗긴지 오래지 않은 메밀은 향이 좋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향은 휘발되고 맛도 떨어진다. 수확 후 잘 말려서 껍질째로 저장했다가 쓸 일이 생기면 ‘ᄀᆞ래’라고 하는 맷돌로 갈면서 껍질을 벗기고 쌀과 가루를 내어 썼다. 할머니가 맷돌로 메밀을 갈 때면 최소한 느쟁이범벅이나 칼국수는 먹겠구나 하고 은근 들뜨곤 했었다. 고운 가루나 쌀을 선별하고 나면 맨 끝에 메밀껍질이 많이 섞인 거무스름한 가루가 남는데 이걸 ‘느쟁이’또는 ‘는쟁이’라고 했다. 약간은 까칠한듯하면서도 메밀향이 짙다.

고운 가루로는 떡을 만들었다. 산북지역에서는 팥이나 고구마로 소를 넣은 반달모양의 새미떡, 납작한 정사각형의 인절미를 만들기도 했다. 가루를 쒀서 묵을 만들고 메밀쌀을 물에 불리면서 주물러 뺀 전분으로는 청묵을 만들었다. 산모는 메밀ᄌᆞ배기(수제비)나 가루를 풀어 넣은 국을 필수적으로 먹었다. 국이나 고사리육개장을 끓일 때도 메밀가루를 썼다. 다양한 쓰임새 중에 제주다움의 첫 번째가 단연 빙떡 아닐까 싶다.  

메밀과 함께 중요한 빙떡의 재료는 무다. 노지에서 나는 제주의 겨울 무는 달고 싱싱하다. 빙떡은 제철의 무와 메밀이 만들어내는 겨울음식이다.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다. 예전엔 메밀 전을 부칠 때 돼지기름을 섰다. 메밀이 돼지고기와 잘 어울려서인지 그 때 맛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메밀가루를 얇게 반죽해 둔다. 무는 채 썰어 소금을 넣은 물에 살짝 데쳐내어 송송 썬 쪽파를 뿌려 식히고 통깨를 섞는다. 기호에 따라 참기름을 쓰기도 한다.

기름을 두른 팬에 메밀반죽을 타원형으로 얇게 부쳐낸다. 따뜻할 때 전 한쪽 가운데에 무채를 넣고 빙 말아서 양쪽 옆을 지긋이 눌러 붙인다. 소화 걱정도, 칼로리 걱정도 없는 최고의 어른들 음식이다.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그들도 어른이 될 것이고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맛도 있게 마련이니까. 요즘은 옥돔을 구워서 같이 곁들여 먹는다. 손으로 생선가시를 발라내면서 따뜻한 방에서 먹는 빙떡은 별미다. 

메밀떡은 거의 쌀로 대체 되었다. 제례 때 쓰는 묵을 제외하고 반드시 메밀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은 없다. 그렇게 메밀은 제주사람들 곁에서 멀어져 가고 있지만 빙떡은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살고 있다.

국경과 문화의 벽도 음식 앞에서 쉽고 빠르게 허물어지는 요즘이다. 그런데도 빙떡은 제주에만 신비스럽게 남아있다. 한 번에 반하는 맛을 가졌다면 벌써 다문화 국적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변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단순해서 깊은 빙떡 맛처럼 제주가 깊은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지녔으면 좋겠다. 더 보태지도 빼지도 말고. / 김정숙(시인)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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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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