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는 나의 그림책'으로 그림책의 재발견에 나섰던 오승주 작가가 다시 고전을 꺼내들었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논어 읽기 시즌2에 맞춰 <제주의소리>에 인문학 함께 읽기 칼럼을 펼쳐놓습니다. 좋은 생각에 힘입어 우리의 행복이 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논어와 동서양 고전의 향연] (3) 정치와 삶의 정신적 해독제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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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 사마천 (지은이) | 김원중 (옮긴이) | 민음사 | 2015-06-10 | 원제 史記列傳

‘알아서 기는’ 우리들의 내면탐구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은 사연이 많은 작품입니다. 역사서의 표본이지만 글쓴이인 사마천의 성격과 인생은 드라마 그 자체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아끼는 인물이기 때문에 틈틈이 관련 해설서도 여럿 보았죠. 사마천은 중국의 역사 전문가들이 얄미워하는 인물입니다. 역사적 고증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서술 방식이 못마땅한 것이죠. 사마천의 타고난 문학성과 격정(激情)은 <사기>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사기열전>은 <사기(史記)>라는 책에 들어 있는 편의 이름입니다. 사마천은 중국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기전체(紀傳體)라는 독창적인 서술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후에 <한서(漢書)>나 고려시대의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수많은 역사서가 사마천의 체계를 따르고 있습니다. <사기>에는 제왕과 제왕급 공적을 남긴 인물의 기록인 <본기(本紀)>와 제후와 제후급 공적을 남긴 인물의 기록인 <세가(世家)>, 그리고 영웅들의 이야기인 <열전(列傳)> 외에도 엑셀파일처럼 중국 역사를 구분한 <표(表)>, 천문지리를 담당한 가업(家業)을 이어 당시의 생활상이나 제도, 풍속 등을 기록한 <서(書)>가 담겨 있습니다. <서>는 후대 역사서들의 지(志)에 해당합니다.

몇 년 전 지인들과 <사기열전> 원문을 윤독하다가 이 구절에서 책을 덮고 깊게 한숨을 쉬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들의 열람을 기다린다.”(<사기열전>, ‘태사공자서’)

사기열전을 읽으며 정본을 산속에 깊이 숨겨두어야 할 까닭이 너무나 공감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생식기가 잘리는 궁형(宮刑)을 당한 사건인 ‘이릉의 화’도 정무적이기에 앞서 격정적이었던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사기열전>의 ‘이장군 열전’에 따르면 기원전 99년 이사장군 이광리는 3만의 병사 중 5천을 이릉 장군에게 나눠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릉 장군은 8만의 흉노족 병사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죠. 이릉 장군의 부대는 1만여 명의 흉노 병사를 죽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평소 이릉 장군을 흠모하던 흉노의 황제 격인 선우는 자기 딸을 이릉에게 시집보냈고, 이 소식이 한나라에 전해지자 이릉 장군의 처자식이 몰살당합니다. 이 상황에서 사마천이 이릉 장군을 변호한 거죠. 이 사건은 보다 복잡한 내막이 있습니다. 이릉 장군의 직속 상관인 이사장군 이광리의 누이는 한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마천의 이릉 변호가 공론이 되면 이광리 장군의 죄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황제는 사마천을 ‘황제를 속인 죄’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마천은 한나라와 무제의 실체적 진실을 경험했고 <사기열전>에 통렬하게 고발합니다.

장탕이 죽은 뒤로 법령이 치밀해져서 관리들은 사람들의 죄를 가혹하게 다스렸지만, 정치는 점차로 쇠퇴해지고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구경(九卿)들은 그저 자기 직책만을 지키고 있을 뿐 천자의 과실을 바로잡아줄 만한 능력이 없었는데, 어느 겨를에 법조항 너머를 논의할 수 있겠는가? (<사기열전>, '혹리열전')

사마천은 한무제 시절에 유독 혹리(酷吏)가 많았다고 기록합니다. 황제가 옥사(獄事)를 좋아하자 벌 주기 좋아하는 신하들이 자극적이고 혹독한 형벌로 명성을 얻고 황제에게 중용되는 풍토가 그 시절에는 만연했었죠. 유목민족인 흉노와의 전쟁으로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황제의 제국주의적 야망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치달을 때 ‘알아서 기는’ 사람들이 한나라에는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죠.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를 이해하려면 한나라 시대가 수록된 <사기열전>의 후반부, 특히 ‘혹리열전’을 유심히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천을 의사에, 사마천의 시대를 환자에 비유하자면 사마천은 <사기열전>의 후반부를 병의 진단으로 분석하고 전반부를 치료와 처방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마천이 어떤 사회적 정신적 해독제를 우리에게 제시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고전’을 읽은 사람의 두 가지 강점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사마천으로 발전시킨다면 <사기>에 수록된 인물들은 두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개별성과 보편성입니다. 진시황에게 처음으로 반기를 들어 대륙의 영웅들을 각성시킨 진승(陳勝, ? ~ 기원전 209년)이란 인물은 <세가>에 실렸지만 개성이 다분한 인물이며(개별성), 그가 던진 대표적인 메시지인 “세상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는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열정을 일으키는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림책이나 고전을 읽고 글쓰기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생활이 주는 압력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손 놓고 있다가는 ‘정신적 좀비’가 될 것 같은 공포감도 느낍니다. 좀비가 된 채로 10년 20년 맥없이 흘러가버리는 세월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죠.

저는 ‘품부(稟賦)’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람이 타고난 자질과 재능이라는 뜻의 낱말이죠. 사람은 누구나 고유번호 같은 것을 받은 채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기,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갈망하는 휴머니즘은 ‘사회적 본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별성과 보편성은 얼핏 보면 모순된 듯하지만 사람이라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본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를 인도하는 ‘빛’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동안 역사서를 즐겨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특히 왕조의 흥망성쇄를 읽을 때 느껴지는 ‘싸늘함’이 있죠.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멸망시킬 뻔할 정도로 강했는데 왜 갑자기 음주가무에 젖어 멸망을 부추겼을까? 이런 왕들이 우리 역사에서는 무수히 등장하죠. 친일파들은 왜 제 잇속만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으며, 세도정치가들은 벼슬을 사고 팔면서 백성들을 마른 수건 짜듯이 괴롭혔을까? 세기말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짙어집니다.

생기 없는 식물처럼, 재선충에 휩싸인 소나무처럼 이미 죽은 영혼이 자리나 차지하고 있으니 어떤 방향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공직이나 기업 임원 등 중요한 결정을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영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구신(具臣)’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자로와 염구는 공자의 훌륭한 제자이지만 계손씨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 반대하지도 않았고 사표를 내지도 않았으니 구신 중의 ‘상구신(?)’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채 <논어>에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보편성과 개별성을 한 낱말로 표현한다면 ‘인품’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이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면서도 그 사람만의 멋이 담긴 아우라죠. 교육도 육아도 정치도 ‘인품’의 연장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과 도지사에게 막강한 권한이 있는 정치 체제에서 지도자의 인품은 여러 각도로 검증되고 감시받아야 합니다. 국가 정책이나 도정에 입안자의 ‘인품’이 보이는지 강하게 물어야 합니다. 크리에이티브가 보이지 않고 복제한 듯한 정책이 너무나 많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정책의 경우 오히려 잘못된 인품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덕정·서문 복원을 4대강이나 청계청 복원처럼 ‘처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반대가 인간의 보편성에 가까운지 살펴보기보다는 ‘생떼’로 매도하고, 오로지 ‘선한 의지’로만 강행하겠다는 발상엔 더 강력한 보편성의 철퇴로 응징해야 합니다. <논어>와 <사기열전>에서 ‘인품’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멈추면 책을 덮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말을 참 잘해서 공자의 경계를 받는 재아(宰我)가 스승에게 곤란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 말하는 최고의 인격자라면 사람이 우물에 빠졌다고 한다면 당장 우물로 뛰어들겠죠?” 하고요. 공자가 답합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군자를 속여서 우물가에 오게 할 수는 있지만 그를 우물에 빠뜨릴 수는 없다. 잠깐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래 가지는 않는다.” - <논어>, 옹야편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구하는데 맹목적인 것을 군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판이라는 응답이죠. 맹자도 제자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을 건네 끌어당겨야 하는데 아녀자의 손을 잡는 게 군자로서 옳은 길인가 하는 질문이었죠. 맹자는 손을 뻗어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며 일갈하죠.

사람이 물에 빠지면 손으로 구하고, 세상이 물에 빠지면 도로써 구해야 한다는 명언과 함께요. 여기서도 맹자의 인품이 느껴집니다. 사마천이 매우 존경하는 인물 ‘안영’의 인품도 이와 같습니다. 사마천은 “오늘날 안자가 살아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서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흠모한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입니다.

안자는 제나라 장공(莊公)이 대부 최저(崔杼)의 반역으로 죽었을 때, 그 사신 앞에 엎드려 소리 높여 울고 군신의 예를 다하고 떠나 버렸다. 이것을 어찌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은 용기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사기열전>, ‘관·안열전’

장공이 시해되었을 당시는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생살부(生殺簿)를 든 한명회(韓明澮) 같은 반군세력이 충성을 강요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죽이던 순간이었습니다. 안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No”를 외칩니다. 반군세력은 안자를 죽이고 싶었으나 그는 국민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그를 죽이면 자신들도 무너진다는 두려움에 안자를 살려줍니다. 이런 용기와 배짱은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오늘날같이 중차대한 시간에는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자신의 불이익을 각오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떤 불합리도 개선되지 않을 만큼 만성적인 사회가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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