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읽기] (48) 장훈교 『밀양 전쟁 』 /서영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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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훈교 『밀양 전쟁-공통자원 기반 급진 민주주의 프로젝트』나름북스, 2016년.
우리 사회는 공감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공감은 커녕 나의 일이 아니면 이해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다반사다. ‘나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남의 일 걱정 해 줄 시간이 어디 있어’ 정도의 일상의 언어가 아니라 경쟁력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에서 타자와의 공감 노력을 비용으로 계산하는 ‘공식화’된 교육의 효과라는 점에서 심각하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단식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폭식투쟁’이라는 이름의 조롱을 서슴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 당장 내게 닥친 문제가 아니라면 국가에 의한 폭력과 재난이 구조적이어서 곧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문제라는 엄연한 사실에 눈감아 버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타자의 고통을 조롱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문제는 국가가 이런 논리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효율의 이름으로, 경쟁력의 이름으로, 성장과 개발의 이름으로. 정치인들은 앞장서서 이기적이다 못해 파렴치한 범죄행위를 앞장서서 실천한다. 국가에 대한 사명감이나 역사의식보다는 개인의 안정된 직장과 경력만을 추구하며 공무원시험을 통과한 관료들이 더해지면 공공성과 정반대인 사적 이익추구에도 대충 눈감고 그것과 타협하고, 때로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소장 사회학자인 장훈교의 『밀양전쟁』은 언뜻 보기에 전문적인 사회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독자에게는 어려운 전문서적처럼 보인다. 한국전력산업의 역사를 충실하게 정리하고,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면서 ‘공통자원’과 ‘급진 민주주의’의 논의가 다소 무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젊은 연구자의 공감능력 회복을 위한 몸부림으로 읽혀진다. 그리고 그 몸부림 속에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잊고 있는 본성, 사회적 동물로서의 역량에 호소한다.
 
‘밀양’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중 가장 첫 번째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국민 앞에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대면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국가권력은 과거 군사주의적인 발전주의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민주화는 시민들이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을 열어 놓았다. 더 이상 과거 군부독재시절처럼 국가의 명령에 의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은 없어졌다. 그런데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삶터를 빼앗기고 오랫동안 가꾸어왔던 삶의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집단이기주의만을 앞세운 사람들로 낙인찍고, 몇 푼 되지 않는 보상금으로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파괴하는 것은 군사독재 시절 강압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낙인찍고 파괴한 후 가해지는 국가의 폭력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행사되는 방식과 강도에 차이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폭력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군사독재의 폭력과 민주화 시대의 폭력은 다르지 않다. 

장훈교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러한 폭력은 ‘전체’의 이익을 앞세운다. 그러나 이해 당사자들의 참여와 토론이 없는, 그리고 전체 국민들 앞에 국가정책과 관련된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합리적인 토론 과정을 거치지 않는 우리의 권위주의적 정치구조 아래서 ‘전체’는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민주주의는 정당성을 토대로 삼는다. 정당성은 사람들이 권력의 행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정치를 소수 정치인의 일로만 가두고, 권력과 자본을 감시해야 하는 시민의 당연한 권리와 의무를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적행위로 몰아가는 사회는 정당성을 얻어지는 통로 자체를 차단한다. 정치에 분노하는 사람들을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만이 강화되고 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타자의 고통과 공감하는 자연스러운 감정마저도 ‘부당한 개입’으로 처벌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사람을 능력자로 치켜세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나의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 심성만 남는다. 국가정책의 정당성이 논의될 수 있는 공론의 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 받는 시민을 국가 전체에 적으로 돌리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공격은 폭력성을 과학적 담론으로 포장한다. 다소 길지만 장훈교의 책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 

“이 전략[국가전력망구축]의 핵심은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 때문에 급증한 전력망 구축 투자비용의 비효율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곧, ‘효율성’을 중시하는 현대 경제학의 관점에서 갈등에 대응한다. 투자의 효율성을 위한 기본 전략은 투입 비용은 줄이고 전력 수요의 성장에 조응하는 공급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런 방침에 따라 한국전력은 전력의 수송 능력이 345kV 송전선에 비해 4.8배에 달하는 765kV 송전 선로 구축 계획과 활용 연구에 들어간다. 공학적인 측면에서 765kV 송전 선로는 동일용량 대비 345kV 송전 선로 5개 선로를 대체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최대 20%의 송전 손실 절감 효과가 있다. 
따라서 765kV 송전 선로를 활용할 경우 원거리 송전 선로 구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수를 양적으로 줄일 수 있는 동시에 전국 전력 수요의 40% 이상이 집중된 수도권까지 안정적으로 전력을 송전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전략의 목표는 분명했다. ‘수도권 근처에서 발전소가 건설될 경우 발생하는 비용을 절감하여 고라과적으로 국가 전체에 이익이 돌아오는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해서였다.”(58-9쪽)
국가 전체의 이익 앞에 어떤 국민들의 이익은 희생될 필요는 있다. 그런데 그 국가는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생각하기 보다는 공학적인 고려로부터 국가 전체의 이익을 도출한다. 갈등의 양을 줄이기 위해 훨씬 가혹한 희생을 강요받을 사람들의 고통은 통계적인 인식에서는 그냥 갈등의 빈도수가 줄어든 것에 불과하다. 수도권과 발전소, 그것도 위험천만한 원자력 발전소가 밀집되어 있는 경남 지방과의 지역 간 불평등도 공학적 고려와 통계적 인식에는 반영되기 어렵다. 시민들이 나서서 권리를 주장하면 돌아오는 것은 다시 ‘이기적’이라는 비난뿐이다. 

이제 우리는 심증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정치인과 관료들의 ‘이기주의’를 알게 되었다. 말로는 ‘국가’를 운운하지만 그들이 한 짓은 공적인 권력을 사욕을 채우는데 쓰는 것이었다. 한 두 사람의 일탈이 아니라 공직 사회 전체에 부패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들이 앞세우는 ‘과학’은 사람이 빠진, 아니 사람을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왜곡된 과학주의적 태도일 뿐이다. 복잡한 사회적 과정으로부터 분리되어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만을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낡고 협소한 과학을 신봉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주의적 태도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경제학적 논리를 좋아한다.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든 말든 오직 숫자로 표현된 경제성장률에만 신봉하는 논리 말이다. 그리고 그런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우리들 모두의 삶을 좌지우지 한다. 사람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드는 것을 ‘경제 살리기’라고 말하는 것이 소위 전문가들의 ‘전문지식’ 아닌가?
   
제주사람들에게 밀양은 남의 일이 아니다. 제주사람들은 또 다른 밀양인 강정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협소한 과학주의적 태도와 삶이 빠진, 그래서 함수와 그래프로만 설명되는 경제학적 논리로 포장된 비민주적 전문가주의는 밀양과 강정에 그치지 않는다. 장훈교의 말처럼 우리는 수많은 밀양들을 경험했고, 앞으로도 수많은 강정들을 경험해야 한다. 

이러한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공감과 연대를 만들어내고 있지 못하다. 강정은 강정주민들만의 문제가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국가가 과학과 경제학의 논리를 근거로 자행하는 폭력을 목격하면서도, 그리고 그것이 곧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일이 아니면 무관심하고 지금의 피해자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안이함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장훈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밀양의 전쟁은 밀양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전쟁은 국가-자본에 맞선 권리투쟁에 그치지 않고 우리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통자원 기반 급진 민주주의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이윤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충족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상품으로 환원되지 않은 공통자원(Commons)을 사회의 중심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급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프로젝트에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하지만 우리 삶을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었던 사회시스템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분명하다. 장훈교는 이러한 사회전환의 계획을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공감으로부터 시작했다. ‘나’의 행복은 ‘나’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회복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서영표 제주대 교수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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