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25) 돼지고기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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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고기무국. ⓒ 김정숙

입학식을 하고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햇살은 따스해도 유리창 안은 춥다. 서먹한 얼굴들과 겉 다르고 속 다른 날씨에 긴장하는 3월. 이런 날 뱃속 든든하라고 어머니는 고깃국을 끓여 주셨다. 무와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국에 밥 서너 술 말아 놓으면 없는 입맛도 잘 다독여 주었다.

제주음식의 절반은 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해공을 망라하여 끓여내는 국이 참으로 다양하다. 풍족하지 못한 재료로 여럿이 나누어 먹는 데는 ‘국’만 한 요리가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 국물이라도 나눌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 뿐인가. 재료를 익히면서 우러난 물을 알뜰하게 살려내는 방법이기도 했으니.

소고기는 어려워도 돼지고기는 간혹 먹을 수가 있었다. 반 근이 채 안되어도 국이라면 예닐곱 식구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자잘하게 썰어 고깃국물이 충분히 우러나게 끓인 다음 나박나박 썬 무를 넣는다. 무가 살짝 익으면 메밀가루를 물에 풀어 넣는다. 옅은 회색 수프 같다. 소금이나 국간장으로 간하고 송송 썬 쪽파를 곁들인다. 더러는 고춧가루나 깨를 쓰기도 한다.

메밀과 무와 돼지고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노지에서 겨울을 난 무가 달콤하고 메밀이 돼지고기 맛을 순화 시켜준다. 여기에 밥을 말아서 김치 한 조각 얹으면 그만이다. 소화 잘되고 부담스럽지 않은 아침밥상이다. 개학을 하고 나면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가끔 이 국을 끓여 주었었다.

나는 무를 많이 먹을 요량으로 고기보다 무를 듬뿍 넣고 끓인다. 잡다한 뼈를 푹 고아 무나 배추를 넣고 끓이기도 한다. 이때는 메밀가루를 쓰지 않는다. 배추나 무를 넣고 소금으로 간한다. 뼈를 고아낸 국물에는 떡국을 끓여도 좋다. 어머니는 무를 넣고 떡국을 끓이셨다. 사실 제주는 쌀이 귀한 땅이라서 떡국을 끓여 먹은 것은 그리 오래지 못하다. 그리고 모든 국물요리에는 채소를 듬뿍 넣는 것이다. 국은 물론 수제비를 끓일 때도 채소를 넣는다. 돼지 뼈를 고아 떡국을 끓일 때는 무를 넣는다. 맛이 잘 어우러진다. 무를 많이 넣어 떡 반 무 반으로 끓인 떡국은 가벼운 끼니로 그만이다. 돼지고기무국은 기억하지 않는 아이들도 떡국은 할머니 표 떡국이 최고라고 말한다.

채소를 듬뿍 넣어 먹는 제주의 ‘국’은 작고 소박하다. 밥과 반찬으로는 채우지 못한 배를 가려주는 음식이었다. 요즈음은 국물을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국이 없는 식탁도 많다. 국물이 문제라기보다 편식과 과잉으로 오는 불균형이 문제다. 음식, 돈, 사랑, 이 모든 것들의 편식과 과잉은 닮았다. / 김정숙(시인)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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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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