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제주4.3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된다. 1948년 미군정 하의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참극은 3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세계사에서 전쟁 지역이 아닌 좁은 공간에서 이처럼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은 없었다. 2003년 10월15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면서 4.3문제는 전기를 맞게 된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이 멀다.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제주의소리>가 △진상규명 △명예회복 △미국 책임 규명 △배·보상 △정신계승 등 4.3문제의 완전 해결로 나아가기 위한 과제들을 점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4.3 70주년 D-1년> 연중기획을 진행한다. [편집자 주]
1948년 겨울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할머니(이영문)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멍이 들었다.
할아버지(김봉문)가 온 몸이 까맣게 변한 할머니를 방안에 눕히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아궁이 불을 지펴 뜨거운 수건으로 연신 몸을 녹였다. 며칠이 지나도 피멍은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며칠 후.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할머니가 고팡(창고)에 쌀을 가지러 간 사이 마당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부엌에 있던 한 여자아이가 옆 집으로 내달렸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순식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라졌다. 잠시후 보리밭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탕’, ‘탕’.
1949년 1월5일 당시 김낭규(78) 할머니의 나이는 열 살(본인은 8살로 기억)이었다.
1940년대초 김 할머니의 유년 시절은 행복했다. 아버지 김대진씨는 당시 함덕국민학교 교사였다. 1945년에는 아버지가 자비를 털어 지역유지들과 함께 신촌국민학교를 세웠다.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는 등사기(인쇄기)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작은 방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광복을 기념해 다가오는 3.1절에 주민들에게 나눠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무장대 활동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눈만 뜨면 경찰과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쳐 아버지의 행방을 물었다.
이번엔 어머니였다. 군경에 잡혀간 어머니(김양순)는 보름 넘게 소식이 끊겼다. 삼남매는 외가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조천수용소로 끌려간 어머니 뱃속에는 넷째가 있었다.
조천리 옛 동양극장 앞 밭으로 끌려간 어머니를 향해 경찰이 총을 겨눴다. 한발씩 몸 이곳저곳을 겨냥해 잔인하게 죽였다. 총알이 몸에 박힐 때마다 어머니는 돌 밭에 몸을 굴렀다.
마을주민들이 수습한 어머니의 손에서는 손톱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통 속에 땅을 긁은 손은 피멍이 들어 퉁퉁 부어있었다. 1949년 1월10일. 당시 어머니는 26살이었다.
군경을 피해 산으로 숨은 아버지는 그해 초여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조천읍 진드르의 보리밭을 찾았다. 당시 아버지는 아내와 부모가 주검이 된 사실조차 몰랐다.
가족들을 기다리며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던 아버지를 향해 경찰들이 총을 겨눴다. 1949년 6월10일 그렇게 아버지마저 세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김승화)은 군경에 끌려가 마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행방불명됐다. 20대였던 이모는 주정공장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뒤 집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숨을 거뒀다.
“어릴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정말 행복했었는데,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어. 우리 아버지는 산폭도가 아니야. 대체 누가 그런 굴레를 씌웠는지 너무 속상하고 원통하단 말이야”
기구한 운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을 통해 4.3희생자로 명단에 오른 아버지의 명패가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서 철거되는 일이 벌어졌다.
2007년 당시 4.3위령제에 참석해 가족들 위패에 술잔을 올렸지만 아버지 이름은 없었다. 털썩 주저 앉은 김낭규 할머니는 대성통곡했다. 다른 유족들이 모두 김 할머니를 응시했다.
“대체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어. 가족을 지키려고 일본 밀항까지 시도했던 분이였어. 가장이었고 교사였고 마을청년이었지. 그리고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했던 분이야”
할머니는 4.3당시 경찰이 쫓는 아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사진을 항아리에 넣어 밭에 묻었다. 수십년이 지나고 김낭규 할머니가 우연히 항아리를 발견했지만 사진은 썩어있었다.
김낭규 할머니가 사진 하나를 내보이며 눈물을 흘렸다. 손가락으로 한 남성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학창시절 모습이었다. 그 위로 자신의 명함사진을 한 장 올려놓았다.
“아버지, 어머니 생각만하면 눈물이 나. 차라리 나도 그때 총에 맞아 죽었으면…. 지난 70년간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었어. 죽기 전에 위패봉안소에서 아버지 이름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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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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