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읽기] (50) 아즈마 히로키 『일반의지 2.0 루소, 프로이트, 구글』 /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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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즈마 히로키 저, 『일반의지 2.0 루소, 프로이트, 구글』, 안천 역, 현실문화, 2012
1. 두 개의 광장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과정은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에 흥분되면서도 무엇인가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힘든 시간들이었다. 그 답답함은 검찰조사에도 응하지 않고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았던 대통령이 이름 없는 인터넷 TV와 인터뷰를 하면서 꺼내놓은 말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촛불집회의 두 배에 달하는 태극기 집회가 열리고 있고, 그 애국시민들에 의해서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청준이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에서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듯이 범죄의 희생자들이 가해자에게 원하는 것은 죄에 대한 고백임과 동시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런데 그 소설의 범죄자처럼 죄를 지은 자가 스스로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거듭나 버리면 피해자는 원천적으로 그를 용서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스스로를 구원할 기회를 영원히 얻지 못하게 된다. 탄핵은 되었으나 마음이 답답한 이유는 국민이 탄핵당한 대통령을 용서하고 위로할 권리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 다른 답답함의 원인을 생각해 보자면, 대부분 나이 많은 노인들로 이루어진 태극기 집회의 광장이 어떤 소통의 가능성도 없는 닫힌 광장이라는 점이다.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나와 대통령의 무죄를 외쳐대는 노인들의 주장과 구호 속에서는 어떤 일관된 논리를 찾기 어렵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차분히 이유를 말하는 대신 태극기를 작대기 삼아 폭력을 휘두르기 일쑤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의사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모든 정치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려면 쌍욕을 내뱉는 노인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탄핵된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노인들은 1970년대의 경제성장에 대한 향수와 반공주의적 애국심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변한 세상을 사는 젊은이들은 그 노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 변화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디지털 혁명이 이끌어 온 정보사회의 등장이다. 거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정보사회에서 개인은 더 이상 이성적 주체로서의 고정된 자아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개인은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만나는 가상세계 속에서 다중적인 인격체를 형성한다. 탈중심화된 개인은 더 이상 주관과 객관으로 나뉜 이원론적인 세계 속에서 살지 않는다. 이렇게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사는 세계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여전히 통일적인 자아를 찾아 헤매는 시대착오적인 노인들의 세계와 질적으로 다르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 노인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새로운 종류의 인간들을 맞닥뜨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나머지 그저 욕을 내뱉고 작대기를 휘두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면 그 노인들과 소통해야 하고 갈라진 두 광장을 하나의 의사소통의 광장으로 묶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매우 어려운 정치철학적 난제이다. 그렇지만 양자의 소통을 생략하고 모두에게 바람직한 정치적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면 어떨까? 디지털 사회는 이런 엉뚱한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2. 일반의지 2.0

‘정보사회’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학자들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극복하고 직접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기술적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들이 손쉽게 조작될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그와 같은 논의는 더 발전할 수 없었다.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무엇보다 빅브라더가 등장할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정보사회론자인 아즈마 히로키(東 活紀)는 오늘날의 데이터 기반 사회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는 인터넷의 빅 데이터 속에서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가 이미 존재하며 그것을 분석하고 실현할 전문가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일반의지 2.0, 루소, 프로이트, 구글』(2012)에서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최종적으로 숙의도 없고 선거도 없는, 정국도 담합도 없는, 애당초 유권자들이 불필요한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데이터로 환원된 욕망의 집약만을 잠자코 행하는 ‘또 하나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정치에 대해 품고 있는 구제불능일 정도로 낡아빠진 이미지, 정당 지도부가 요정에서 나누는 밀담이나 땀으로 범벅이 되면서 목청 터져라 한 표를 호소하는 선거와는 전혀 다른 제도, 전혀 다른 운영 방식을 이용한 통치의 가능성을 사유한다.”(9쪽)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토론, 선거 등의 과정이 생략된 민주주의이다. 다소 과정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면 숙의하고 토론할 것이 아니라 그저 구글링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파격적이긴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편 살펴볼 만하다. 그는 정보사회에 관해 낙관하는 다른 논자들과 마찬가지로 데이터가 양적으로 커지면 거기서 어떤 질적인 변화가 생긴다고 믿는 듯하다. 그런 변화의 한 가지는 흔히 ‘집단지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는 스콧 페이지라는 미국 연구자를 인용하여 ‘다양성 예측 정리’와 ‘군중은 평균을 상회한다는 법칙’을 받아들인다. 다양성 예측 정리란 다양성이 늘어날수록 구성원의 능력부족을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고, 군중은 평균을 상회한다는 법칙은 군중의 예측이 구성원의 평균적인 예측보다 더 정확해진다는 것이다. 집단지성이라는 개념을 떠받치는 이 두 정리를 그는 애매모호한 경험칙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증명된 객관적인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히로키는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홉스의 그것을 비교하면서 사회계약에 의해 개인의 권리를 정부에 양도한다고 보았던 홉스의 생각은 정부에 저항하지 못하는 개인을 전제하고 또 전체주의를 낳을 위험이 있으므로 루소의 사회계약설이 민주주의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루소에 의하면 정부가 행하는 일은 개인으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아 주권을 행사하는 주체가 아니라 ‘일반의지’를 수행하기 위한 기관에 불과하므로 만약 정부가 그와 같은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국민은 얼마든지 정부의 교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가 생각한 ‘일반의지’는 그런데 개인의 의지의 합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이념적인 존재로서 현존하는 제도의 부패를 고치는 현실적인 논거로서 작동한다. 그것은 통치기구와 별개로 존재하는 이념으로서 ‘여론’과도 구분된다. 여론은 기껏해야 ‘전체의지’에 불과하다. 즉 사적인 이해의 총합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 일반의지는 공통의 이해에 관계한다. 일반의지는 정부의 의지가 아니며 개인들의 의지의 합도 아니다. 그것은 수학적인 존재이다. 이런 발상에서 히로키는 빅데이터 속에서 수학적으로 산출가능한 일반의지를 찾아내고자 한다.

히로키는 자신의 주장이 아렌트나 하버마스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이 “정치 개념을 기존 사회사상의 틀에서 해방시키려 하는 일종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는”(78쪽)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의사소통의 과정이 없이 일반의지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히로키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축적되고 있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일반의지가 존재하는 장소라고 말한다. 일반의지는 데이터베이스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을 수학적인 방식으로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이 히로키의 기본적인 아이디어이다. 이런 일반의지를 히로키는 루소의 일반의지와 구분하여 일반의지 2.0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히로키의 생각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는 우리가 일반의지 2.0을 손에 넣었으며 적어도 그 실현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의지를 누가 ‘대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오늘날의 사회는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에, 즉 처리해야 할 정보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아렌트나 하버마스가 말하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은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으로 바뀐다고 주장한다. 의사소통을 통해서 각자의 선호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을 여지는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 정치적 과제는 대의민주주의를 통한 민의의 반영이 아니라, 일반의지2.0을 발견하여 수행하는 정부를 만들어내는 일이 된다. 그런 정부를 히로키는 정부2.0이라고 부른다. 정부2.0은 정보환경에 새겨진 행위와 욕망의 집적, 사람들의 집합적 무의식=일반의지에 충실해야 한다. 그가 말하는 일반의지는 사람들의 의식의 합이 아니라 무의식(욕망)의 집적을 뜻한다. 그는 새로운 정치에서 수행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의식적인 대화를 통해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들의 무의식적인 욕망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공공성은 의식적인 발견물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적인 영역에 존재한다. 정부는 그와 같은 새로운 공공성을 발견하고 실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히로키의 정부2.0은 인터넷의 빅 데이터에 축적된 국민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통치에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이 곧 우리가 데이터베이스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는 정부2.0은 데이터베이스 안에 축적된 무의식적인 욕망을 때로는 억제하고 때로는 실현하면서 통치해 나가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정치가 그 무의식적인 욕망을 무시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제 중요한 과제는 대중의 무의식을 가시화하고 그것을 전문가들이 숙의하는 공간에 개입시킬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설계하는 일이 된다. 

히로키의 일반의지2.0은 데이터 기반 사회에서 정치적인 의제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발상이 너무 급진적이고 기발해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을 토대로 삼고 있는 기존의 민주주의 이론들은 히로키의 주장대로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목도하는 어떤 광장에서 우리는 이성적이지 못한 개인들을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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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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