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서영표 제주대 교수...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최근 몇 년 동안 제주는 전국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외자 유치와 인구 유입, 관광객 1500만 시대 진입 등. 이로 인해 제주는 일찍이 겪어본 적 없던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쓰레기, 오폐수, 교통, 부동산폭등, 난개발, 환경파괴까지. 급기야 제주가 이대로 가도 되겠느냐는 근본적인 성찰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에 주목해온 서영표 제주대 교수에게 제주의 현주소와 미래에 대해 얘기를 듣는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4) ‘지속가능한 제주 발전계획’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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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곶자왈. <제주의소리 자료 사진>

제주에 필요한 ‘지속 가능한’ ‘제주 발전계획’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제주사람들이 원하는 개발은 ‘삶의 질’을 보장받고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개발 말고는 길이 없다는 권력과 자본의 주장 외에는 ‘행복’과 ‘만족’을 향한 길을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마지못해 동의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보통의 제주사람들은 분열증에 시달린다. 자신의 기억과 추억이 살아 있는 공간들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슬픔과 개발의 강렬한 욕구가 동시에 존재한다. 제주도 전체의 생태적 가치가 보전되어야 한다고 느끼지만 자신의 주변이 도시화되어 콘크리트로 덮이는 것은 내심 반긴다. 그리고 개발주의가 동반할 수밖에 없는 시장의 원리, 경쟁의 원리가 몸에 새겨진다. 몸과 마음을 잠식해 들어오는 맹목적인 개발주의에 저항하기 보다는 거기에 편승해 승자독식과 우승열패의 게임법칙을 승인하고 생존을 건 투쟁에 뛰어든다.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과 능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은 투자-부채와 연동된 위험스런 도박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자기 바깥의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다. 그건 패배자의 낙인일 뿐이다.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것은 이런 분열증과 소수만이 인정받고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제주 발전계획’이다. ‘지속 가능한 제주 발전계획’은 제주도민 전체의 의견이 반영되어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의 수립과정은 자원, 정보, 지식의 불평등이 해소되는 숙의 민주주의를 통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 당장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윤곽 또는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다. 무엇보다도 ‘지속 가능한 제주 발전계획’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문화관광을 핵심으로 해야 한다. 양적인 팽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광의 질적인 수준을 높여야 한다. 문화적 내용과 역사적 깊이를 체험하고 자연 속에서 느림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관광으로 옮겨 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는 독특한 신화와 역사의 두터운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평화와 인권을 관광과 결합시킬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전환은 제주가 가지는 독특한 조건을 활용한 농업정책과 맞물려야 한다. 제주는 도농복합형 도시의 특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지금처럼 단조로운 택지를 확장하고 상품작물 재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지역 순환 농업’을 고민해야 해야 한다. 이러한 지역 순환 농업은 ‘도시농업’과 결합되어 ‘농민시장’, ‘친환경 급식 네트워크’ 등의 시민사회조직을 통한 농산물의 지역 내 유통뿐만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를 두엄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쓰레기 순환까지 고려해야 한다.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문화관광과 지역순환 농업과 도시농업, 그리고 친환경 먹을거리 생산과 유통은 도시계획의 전환에 기초해야 한다.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도시계획은 역사와 문화를 머금을 수 있도록, 도시 속의 농업과 녹지가 살아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전환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사람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행위를 차단하는 도시계획은 더 이상 추진되어서 안 된다. 에너지를 많이 쓰고 에너지 효율이 떨어지는 주택을 개량해서 자연적인 공기의 흐름과 채광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대중교통 체계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차량대수를 줄이도록 하고 걷기 중심의 관광지 개발, 원도심 재생을 추구해야 한다.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핵심은 자동차 대수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보행자 중심의 도시를 회복하는 것이다.
 
도시계획과 건축양식의 변화는 녹색에너지 체계로의 전환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풍력, 태양력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를 적극 지원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재생에너지가 가지는 분산성과 다양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공동체 단위가 다양한 에너지원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다양성, 분산성, 지역성은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고 효율화하는 에너지체계 전환 운동의 일환이어야 한다. 

이러한 큰 틀에서 지금은 사적인 부로 간주되고 있고 끊임없이 사유화되고 있는 공동자원(commons)을 공적으로 관리하는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 물, 바람, 토지는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공동자원으로 투기의 대상이 되어 사적인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제주도에서 유지되고 있는 ‘공수’의 원칙, 그리고 논의되고 있는 ‘공풍화’가 토지의 관리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현재 제주도정은 일관된 발전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녹색의 수사와 노골적인 개발주의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관되지 못한 것은 제주도정의 개발주의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윤곽을 제시한 ‘지속 가능한 제주 발전 계획’이 없기에 자본과 권력이 시도하는 개별 개발 사업에 대한 반대 이상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런 식의 대응은 결코 제주도민의 열망을 정치적으로 모아 낼 수 없다. 쌓이고 있는 불만이 개별적인 불만, 좌절, 원한으로 해소되어 버리고 정치적인 힘으로 조직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속 가능한 제주 발전계획’은 정치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급진화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형식적으로 주어지는 껍데기뿐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숙의를 가능하게 할 자원, 정보, 지식의 급진적 재분배를 전제로 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 말이다. 이것은 지역정치를 복원하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며, 그 과정에서 도민의 정치적 의식을 높여내야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의 급진화는 사람들 마음속에 쌓여 있는 좌절과 불만이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고 정책 수립과정에 반영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다. 

급진화된 민주주의에 기초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반영한 지속 가능한 발전계획은 사회의 지속 가능성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기후위기 극복방안이기도 하다. 무성한 ‘위기’ 담론과 ‘성장’ 담론이 분리되어 사고되면서 발생시키는 이율배반은 이렇게 극복될 수 있다. 위기는 그것을 발생시키는 구조적 조건 아래서는 해결될 수 없다. 기후위기를 말하면서 토건과 자동차문명에 기초한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모순인 것이다. ‘천혜의 섬’ 제주를 상품으로 내다 팔면서 수용능력(carrying capacity)을 훨씬 넘는 경제적 팽창만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다. 그래서 ‘해양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바다에 콘크리트와 철근을 박아 넣고 제주의 조건은 고려하지 않은 채 숫자로만 인식되는 관광객을 받아들이기 위해 제2공항을 짓겠다고 하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해 나가야 할까? 무엇이 가장 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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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제주의소리
‘시작’이라는 단어는 지금까지의 논의 맥락에서 적절하지 않다. 한편으로 개발주의의 포로가 된 듯 보이지만 사람들은 일상에서 자본의 논리와 화폐의 힘에 저항하는 다양한 형태의 실천을 하고 있다. ‘다른 세상’은 이미 언제나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시키길 원하는 현실 안에 존재한다. 다만 자본의 논리와 화폐의 힘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치인, 관료, 전문가들이 이러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장 시급한 것은 ‘이야기하기’다. 도지사와 그 측근들의 머리로부터는 결코 패러다임 전환의 길이 나올 수 없다. 무수히 많은 목소리와 몸짓들이, 다소 소란스럽게 이야기되고 토론될 때에만 새로운 생각들이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이야기하기와 이야기듣기가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정치인, 관료, 전문가들은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의 낭비로 생각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판단이야말로 극복되어야 할 낡은 패러다임의 실체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서영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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