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평화 강정 10년] [데스크칼럼] ‘맨몸 저항’ 대가 혹독...구상권부터 ‘매듭’ 풀어가길 

참 오래 버텼다. 장장 10년이었다. 하지만, 그 시련은 한 마을이 감내하기엔 너무 가혹했다. 

속울음을 삼키면서도, 실상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맨몸 저항이 거의 전부였다.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구럼비가 처참히 부서질 때도, 행정대집행에 맞설 때도 망루에 오르거나 인간 사슬을 엮는 것 말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데자뷔처럼, 4.3당시 소름끼치는 장면을 연상케하는 육지부 응원경찰이 몰려올 때도 몸으로 막아설 뿐이었다. 

김태환 도정이 해군(국방부)의 장단에 맞추기 바빠도, 우근민 도정이 공허한 ‘윈윈 해법’만 되뇌어도, 원희룡 도정이 ‘진상조사+명예회복’ 카드를 내놓고는 무기력해도 강정은 자신들을 헤아려 달라고 외칠 뿐이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말이다. 

애초 그들의 요구는 소박하고 단순했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 자연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진상조사와 공동체 회복은 갈등의 골이 패일 대로 패인 뒤에 나왔다.

그러나 대가는 혹독했다.    

# 마을의 안녕과 평화, 자연을 지키자고 했을 뿐인데...

연인원으로 700여명의 주민과 평화활동가가 연행됐다. 이들이 재판에 넘겨져 부과된 벌금만 4억원에 육박한다. 해군은 끝내 ‘마이웨이’를 고집했다. 이들에게 ‘1차로’ 30억원이 넘는 구상금을 청구해 지역사회의 화해·상생 요구를 철저히 외면했다. 반대 세력은 씨를 말리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강정 주민들에게 이러한 물리적 압박은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다.   

2009년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 주민 53%가 우울증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동체는 갈갈이 찢겨졌다. 

극심한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가 있다. 마을 중심지에 자리잡은 두 가게 이야기다. 서로 마주보는 두 가게 주인은 해군기지에 관한 입장이 찬반으로 갈렸다. 주민들도 ‘같은 편’ 가게만을 찾았다. 이웃사촌이었지만, 입장이 다른 가게는 눈길 조차 주지 않았다.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따로 없었다. 피붙이 보다 서로 살갑게 대했던 이들을 누가 이렇게 갈라놓았을까.  

심지어 친지, 가족 간에도 찬반이 나뉘어 명절이나 제사를 따로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천륜지정(天倫之情)을 거스르는 광경은 해군기지가 남긴 가장 큰 상흔이다. 

# 해군기지가 뭐 길래...이웃사촌, 천륜지정도 단절  

그동안 참 많은 일이 벌어졌다. 2012년 3월7일 구럼비 발파는 해군기지 본격공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0년 비극’을 잉태한 졸속 마을총회가 2007년 4월26일의 일이니 5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만큼 반대투쟁이 완강했다는 얘기다. 

밀어부쳐야 하는 해군으로서는 애가 탓을 것이다. 이게 결국은 구상권 행사로 이어졌다. 강정 주민을 범죄인 다루듯 한 해군의 막무가내식 일방통행 책임은 묻히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세월호가 가라앉은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공사 지연으로 다급해진 해군은 무리수를 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미디어비평 전문 매체의 끈질긴 취재 끝에 드러난 충격적인 사실. 꼬리에 꼬리를 문 의혹. 보도에 따르면 침몰 당일 세월호엔 제주해군기지로 향하는 철근 400톤이 실려 있었다.(2016년 6월16일 미디어오늘) 당시 세월호 일반화물 총량의 3분의 1이 넘는 막대한 양이었다. 특히 이 철근 가운데 중량톤수로 130톤 가량은 선박의 복원성을 약화시키는 선수갑판(C데크)에 실려 있었다.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울었을 때 제일 먼저 쏟아져내린 것이 철근과 H빔이었다. 

보도 당시 정부와 검찰은 세월호 침몰의 주요 원인으로 과적을 꼽고 있었다. 

# 해군, 공사지연에 무리수? 해군기지와 세월호의 필연적(?) ‘만남’

조타실을 지휘했던 항해사와 2항사는 출항을 꺼렸다고 했다. 전날(2014년 4월15일) 밤 인천의 기상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제주해군기지로 운반되는 철근은 없었다”고 부인한 정부, 국정원의 세월호 도입·운항 개입 의혹, 국내에서 유일하게 국정원에 해양사고를 보고토록 된 청해진해운, 철근 적재물량 축소 발표...

세월호가 침몰 전날 무리한 출항을 한 이유가 제주해군기지 공사 기일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은 차고도 넘쳤다.

참사 훨씬 전인 2009년 국정원과 해군, 경찰, 제주도가 해군기지 대책회의를 열어 ‘반대인사 구속’ ‘외부세력 차단’ 등을 논의한 사실이 KBS 보도로 드러났다. 제주해군기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국정원의 역할을 짐작케했다. 

이렇듯 제주해군기지와 세월호의 ‘만남’은 우연으로만 볼 수 없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지만, 한국사회의 적폐를 드러내는 키워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세계평화의 섬 수호’로까지 구호를 넓힌 강정은 이제 제주해군기지를 ‘미국의 대 중국 전초기지’로 의심하고 있다. 합리적 의심이 드는 상황들이 펼쳐졌다.

# “미 군함은 안 온다더니...다음은 항공모함?”

먼저 미군의 최신예 스텔스 구축함이자 ‘꿈의 전투함’으로 불리는 ‘줌월트호’의 제주기지 배치설이 불거졌다. 지난 1월말 해리 해리스 미국 태평양함대사령관이 한국 측 관계자들과 만나 제주해군기지에 줌월트호 배치를 제안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것이다. 국방부는 줌월트호 배치설을 일축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 주둔군 지휘협정(SOFA)에 의해 미군은 언제든 우리 해군기지를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줌월트호 배치 논란 이후 얼마없어 미군 함정은 보무도 당당하게 제주해군기지를 찾았다. 3월25일 이지스 구축함 USS 스테뎀함(DDG-63)이 외국 함정으로는 처음으로 입항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당시 ‘미군이 이용하지 않는 순수한 대한민국 해군의 기지’라고 했던 해군의 말은 무색해졌다. 이제 강정은 “다음은 항공모함이냐”고 묻고 있다.    

여기서 스테뎀함의 제주 기항 장면을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입항 당시 스테뎀함 승조원들은 모두 정복 차림으로 함정 갑판에 나와 손을 흔들었다. 우리 해군도 100여명의 장병들과 군악대가 이들을 환영했다.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마스코트인 ‘바다 벌’(Sea Bee)도 전면에 등장했다. 

승조원들은 또 함정에서 내린 뒤에는 한 사회복지시설을 찾아 봉사활동, 중문관광단지에서는 문화활동을 벌인데 이어 우리 해군 장병들과 친선 축구경기도 가졌다. 그러더니 이튿날 곧바로 제주 기지를 떠났다. 

이러한 장면을 예언(?)한 보고서가 4년 전에 나왔다. 지금은 주한 미군 해군작전사령부 소속으로 부산에서 근무중인 것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j. 서치타 중령이 2013년 3월 미 육군대학에 제출한 ‘제주 해군기지 : 동북아의 전략적 함의’라는 보고서다. 

# 4년전 보고서는 미 군함 ‘제주기항 지침서’? 

보고서를 낼 당시 서치타 중령은 미 해군 제7함대에서 동북아 훈련 및 정책을 담당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제주해군기지가 완공되면 한국 측의 초청 형태로 미 해군 함정을 보내야 한다. 알레이버크 급 구축함이 첫 기항에 적합하다. (중략) 첫 방문은 3일 이내로 짧아야 한다. (중략) 미국 수병들은 최상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함상에 나와 유니폼을 입고 손을 흔들며 입항해야 한다. 기항하는 함정은 다른 인근 기항지를 들렀다가 오는 형태여야 한다. (중략) 한국 해군 도움으로 승조원들은 특히 이웃한 강정마을 등에서 가능한 한 많은 ‘컴렐’(COMMREL, community relations) 활동에 나서야 한다”고 썼다.

‘알레이버크’ 급 스테뎀함은 3월17일부터 21일까지 동해상에서 한·미 연합 해상전투단 훈련을 수행하고 25일 제주해군기지를 찾았다가 단 하루만에 떠났다.    
 
입항 장면과 보고서 내용은 정확히 일치했다. 이쯤되면 예언서가 아니라 일종의 ‘제주 기항 지침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내용도 있다. “첫 기항 뒤로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수준에서 중소형 함정들이 인천에 미 해군 함정들이 기항하는 빈도 만큼 제주해군기지에 기항해야 한다” “미국은 항공모함의 제주 파견을 미래 대중 관계에 있어 새로운 전략적 지렛대로 삼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미국은 적당한 기회가 나타날 때까지 항공모함의 제주 기항을 아껴둬야 한다”

서치타 중령은 한국 공군이 해군의 대양 작전 지원을 위해 (남부)탐색구조부대 기지를 신설할 것이라는 내용까지 다뤘다. 우리 공군의 남부탐색구조부대 설치는 최근 제주 제2공항 연계 가능성과 맞물려 핫 이슈로 떠오른 사안이다. 

놀라운 ‘예언 적중’에 온 몸이 오싹해진다. 우리 해군과 주한 미 해군 측은 서치타 중령의 보고서가 ‘개인적 의견을 담은 논문’ ‘우연의 일치’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잘 짜여진 각본이 맞다면 제주해군기지에서 미 항공모함을 보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4월26일 강정마을 내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 ‘베트남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희생된 베트남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의 넋을 기리는 피에타 동상 제막식이 열린 것이다. 

4월26일은 2007년 강정에서 소수 주민에 의한 기습적인 마을총회로 박수와 함께 해군기지 유치가 결정된 지 만 10년이 되는 날이다.

# 강정과 4.3, 강정과 세월호, 그리고 강정과 세계평화 

제막식에서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 정선녀 센터장은 “피에타 동상이 들어선 이곳, 해군기지 아픔을 겪는 강정마을이 어머니의 따뜻한 자궁 같은 터가 되길 바란다”며 “강정마을에서 우리는 언제나 무기 없는 평화를 갈구할 것”이라고 했다. 

피에타 동상을 제작한 김서경 작가는 추모사에서 “한국군 총칼에 도륙당한 베트남의 영령들과 일본군에 짓밟힌 우리나라 20만의 꽃, 3만의 제주의 바람, 광주의 5월 꽃비, 제주에 오지 못하고 별이 된 세월호 아이들까지 제주 강정, 구럼비에서 봄날 꽃으로 피어날 것”이라고 국경을 넘어 억울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기렸다. 

강정과 4.3, 강정과 세월호, 강정과 베트남, 그리고 강정과 세계평화. 강정에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평화와 인권의 날줄씨줄을 그려본다. 

19대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주요 4개 정당 후보들은 하나같이 해군의 구상권 철회를 제주지역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사탕발림만 아니라면 좋다. 구상권이 강정 문제 해결의 실마리일 수 있다. 차근차근 풀어나가면 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이제 그만 편견과 오해, 왜곡을 걷어내자. 강정은 지칠 만큼 지쳤다. 이제는 강정을 우리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이자. 10년이면 그럴 때도 되지 않았는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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