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밭담 시간여행] (5)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 밭담 이야기 

제주밭담이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지정되고 3주년을 맞이했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들어온 제주밭담은, 이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물려줘야하는 소중한 인류의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제주밭담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본 연재는 밭담길을 따라 걷다 만난 우리네 삼촌들에 관한 것이다. 밭담과 함께 섬의 살림을 일구어온 한 사람 한 사람의 제주 농민들에게, 미처 보물인줄 몰랐던 보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역사가 곧 제주밭담의 역사이고, 삼춘들의 살아 온 이야기 속에 우리가 후세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 숨겨져 있다. 

월령리 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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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의 밭담. 담너머에는 월령의 명물인 선인장이 자라고 있다. ⓒ정신지
밭농사를 하는 농민이라면 누구나 쌓을 수 있는 것이 밭담이다. 하지만 마을 마다 다양한 생김새의 돌이 있고 땅의 특성이 다른 것처럼 돌담에 관한 이야기는 마을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선인장 수확을 마치고 평상에 앉아계시던 농부 어르신들께 밭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제주의 돌은 마을마다 생김새가 다양한데, 마을 안에는 가까이에 있는 비양도에서 떠내려 온 물에 뜨는 빨간 ‘송이‘도 있고, 얼마 안 되지만 동글동글 귀여운 ’먹돌‘도 있다. 월령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돌은 ’섭돌‘이라는 돌이다. 구멍이 많고 비교적 가볍기 때문에 담을 쌓을 때 거칠게 잘 맞물리는 것이 섭돌의 특징이다. 다른 돌보다 쌓기 수월하다는 섭돌이 월령리 밭담의 대다수를 이룬다. 월령리에는 ’빌레‘(넓게 펼쳐진 화산암반) 지형이 많다. 예전에는 밭에 빌레가 많이 보이면 빌레를 피해(’밭을 톨려‘(제주어 표현)) 농사를 지었지만, 선인장의 경우 뿌리가 옆으로 자라 빌레 위를 덮기도 한다. 

제주의 많은 마을 주민이 공통된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성담’에 관한 기억은 월령리에도 있다. 4.3사건 때 피해를 막기 위해 성담을 쌓았는데, 월령리에서는 성담을 ‘ㄹ’자로 구불구불하게 놓아 미로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외부인이 들어오기가 힘들다. 다른 해안가 마을과 다르게 월령리에 인명피해가 적었던 것은 성담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 회상한다. 4.3사건 이후 그 성담은 허물어서 주민들이 필요한 형태로 쓰였다. 집을 짓기도 하고 밭담을 보수하는 데 쓰였다.  

밭담 사이사이를 순환하는 것들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던 시절에는, 인분을 먹은 돼지의 배설물이 그대로 거름이 되었다. 돼지를 기르는 통시(화장실) 안에는 보릿짚을 까는데, 나중에 그것을 사람과 소가 밟아 보리씨를 섞은 것을 밭에 뿌린다. 바다에서 나오는 해초 또한 훌륭한 거름이었다. ‘둔부기’라고 하는 해초가 거름으로 가장 많이 쓰였으나 지금은 많이 나지 않는다. 월령리에서는 ‘몸’과 ‘감태’ 역시 말려서 밭에 널어놓으면 썩어서 좋은 자연비료가 되었다. 

멜(멸치)에 관한 기억도 많다. 월령리에는 지금도 여름이 되면 모레가 올라오는 지역이 있다. 해수의 흐름이 계절 별로 만들어내는 지형의 변화는 멜을 잡는데도 좋은 역할을 했다. 멜은 원담에서 잡기도 하지만 주로 그물로 잡았다. 멜이 많이 잡히면 남은 멜이 거름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곰새기(돌고래)를 잡던 시절의 기억도 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엔 돌고래를 잡아 불을 피우기 위한 기름을 얻었다. 지금과는 달리 월령리 앞 바다에는 돌고래가 엄청 많았다. 고기는 먹을 것이 없으면 먹기도 했지만 특유한 냄새 때문에 비위가 상해 먹기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힘들었던 지난 시절

일제 강점기를 거쳐 4.3사건을 경험한 이들인 만큼 힘든 지난 시절의 기억이 많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는 ‘감태’나 ‘몸’ 같은 해초를 먹었다. ‘물릇’이라는 작물도 먹었다. 마늘처럼 동그란 뿌리를 가졌고 맛이 엄청 떫다. 가장 먹을 것이 없던 것은 일제 강점기 때였다. 식량을 모조리 공출(일제식민지하에서 전시 군사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1940년부터 강제로 시행된 제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고 4.3사건이 일어났으나 월령리에는 그다지 많은 피해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보초를 섰는데, 자체적으로 총을 제작했다. 늙은 어르신들이 총 만드는 법을 연구해서 화약총을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일본 군인들이 떨어뜨린 화약을 주어다 쓰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아이들도 죽창을 들고 성담을 지키며 보초를 섰고,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고된 시절을 버텼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시작되었고 힘든 시절이 되풀이되었다. 남자 어르신들의 상당수는 일본에 돈을 벌러 가기 위해 밀항을 선택했다. 밀항을 하다가 잡혀서 ‘오무라수형소(1970년대까지 조선인 밀항자를 억류하던 수용소. 일본 나가사키현)’에 수용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잘못해서 잡힌 것이 아니라 살려고 발버둥 치다 잡힌 것이 억울했다. 그렇게 잡히기를 반복하면서도 오사카 등지에 일을 하러간 동네 사람들이 많다. 한 맺힌 기억이 끝도 없다. 지금이기에 말할 수 있는 기억들이 많은데, 그런 기억들을 죽기 전에 다 이야기 하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 말씀하신다. 여성들 역시 밭일과 물질을 함께 하며 집안 살림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남자들이 힘을 쓰는 일을 한다고 해도, 억척스런 일들은 여자들이 도맡아했다. 고생만 하며 살아온 어머니와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마을의 금덩이, 선인장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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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석공 하르방들. ⓒ정신지
선인장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5년 정도 되었다. 그 전에는 다른 지역과 같이 오곡을 주로 심었다. 월령리 주민들에게 있어서 선인장은 ‘금덩이’와도 같은 존재다. 아주 오래 전 떠내려 온 선인장이 월령리에 뿌리를 내려 지금의 선인장 군락을 형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다른 지역에서도 심으면 수확은 할 수 있지만, 주민들은 해가 길고 눈이 오지 않는 기후적 요인이 월령리 선인장 수확에 좋은 여건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선인장 농사에는 요령이 필요하다. 선인장 밭을 둘러싼 밭담은 너무 높게 쌓으면 안 된다. 선인장 키만큼 밭담이 있어주어야 잘 자란다. 그리고 ‘빌레가 호끔 진듯해야(빌레가 넓고 땅이 거칠어야)’ 잘 자란다. 그러한 지형적 특성을 살려 월령리 마을 사람들은 선인장을 효과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선인장은 가만히 둔다고 자라는 작물이 아니다. 비료도 제때 주고 무엇보다 잡풀을 제거하는 것이 일이다. 선인장의 뿌리는 깊지 않으나 옆으로 퍼지는 특성이 있어 잡풀이 무성하면 농사가 되지 않는다. 잡풀 제거를 위해서 주민들은 제초제를 쓴다. 땅에 좋지 않지만 선인장의 특성상 가시가 많기 때문에 손으로 일일이 제거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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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공 하르방의 손. ⓒ정신지

선인장 수확은 11월부터 4월경이 가장 바쁘다. 이 때가 수확기인데, 수확이 무엇보다 힘든 이유는 가시 때문이다. 많은 주민이 가시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고 면장갑 위에 고무장갑을 두세 개 겹쳐 껴도 가시에 찔리기 쉽다. 주민들의 고충은 일손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선인장 수확은 요령이 필요한데, 일손을 구해 일을 하다보면 익숙해지기 까지 시간이 걸린다. 물질도 마찬가지 이지만 가장 젊은 사람이 50세 정도이기 때문에 앞으로가 걱정이다. 그것은 담을 쌓는 일을 하는 석공도 마찬가지다. 

선인장의 수명은 대게 10년 정도이다. 10년이 지나면 열매가 잘 열리지 않기 때문에 그 밭을 포클레인으로 갈아엎어 새로운 선인장을 심는다. 그렇게 새로 심으면 3년 정도 지나야 안정적인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선인장 열매는 땅의 힘이 좋아야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매년 땅이 오염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석공

석공은 현재 일당 30만 원 정도의 꽤나 큰 급여를 받는다. 요령이 좋은 어르신들은 돈을 더 받기도 하는데 요즘엔 새로 지은 집의 담을 쌓는 일을 한다. 전에는 주로 산담을 쌓는 일을 했었으나 장례문화가 변화한 이후에는 산담을 쌓지 않는다. 산담을 쌓던 시절에는 좋은 돌을 구해 무덤이 있는 곳 까지 나르는 것이 고된 일이었다. 제주의 무덤은 주로 마을 인근의 오름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석공들 중에는 힘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로 마을 주변의 고산봉에 무덤이 많다. 무거운 돌을 지고 산 위를 오르는 석공이 마을에 없으면 옆 마을의 힘 센 석공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등에 돌을 지고 큰 돌은 굴려가며 산을 오를 정도로 힘이 센 장사도 있었다. 손이 모자라면 석공이 아니더라도 마을 사람이 협동하여 산 위에 돌을 운반하는 일을 했다. 석공들은 산담에 쓸 돌을 골라 집 앞마당에 펼쳐놓고 그것을 도구를 이용해 다듬는 일부터 한다. 산담을 쌓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밭담의 경우에 석공이 고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60년대에 들어서며 감귤농사가 흥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방풍을 위한 높은 밭담을 쌓을 필요가 있을 때는 석공을 썼다. 그걸 과수원담이라 한다. 방풍나무를 심어 바람을 막는 경우가 많지만, 이전에는 석공들이 감귤 밭의 담을 쌓았다. 보통의 밭담과는 달리 과수원담은 높이 쌓아야하기 때문에 기술이 필요하다. 

밭담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밭담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에 관해 마을 주민은 찬성과 동시에 걱정의 눈빛을 보인다. 밭담을 쌓는 다는 것은, 밭과 함께 일을 해 온 경험이 요구되는 일이다. 반농반어로 평생을 살아온 월령리의 농민들은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그러한 신체의 경험이 있어야 진정으로 제주의 밭담을 보살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주민들은,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농민의 생활을 지켜주는 일이 급선무라 입을 모은다. 새로 마을에 들어 온 젊은 사람들이 남아있는 마을의 어른들이 하는 일을 잘 보고 함께 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남아 있는 밭에서 함께 농사라도 하면 좋을 텐데, 남은 땅에는 무조건 집들이 들어서는 현실이 못내 안타깝다. 제주의 밭담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시스템에 의해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예로부터 밭담은 밭과 밭의 경계를 위해 쌓았는데 한 쪽의 담이 무너지면 무너진 쪽의 농민이 그것을 다시 정비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룰이다. 그러나 요즘은 밭농사를 짓지 않는 땅에 집이 들어서며 쓰임새를 잃는 밭담들이 많아지고 있다. 

선인장농사의 오늘과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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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장을 수확하고 계신 어르신. ⓒ정신지
선인장 군락지로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월령리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밭담 사이사이로 보이는 선인장을 보며 즐거워하는 관광객이 반가운 한 편, 그들이 버리고 가는 많은 양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주민의 몫이 되었다. 현재로써는 관광객이 즐길 수 있는 것이 선인장밭의 풍경 밖에 없다는 것이 불만이다. 선인장 열매를 구입하거나 혹은 선인장 주스라도 마시고 가는 관광객이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남는 것이 쓰레기 밖에 없는 지금 상황에서 주민들은 관광으로 인한 소득을 거의 얻고 있지 못하다. “예쁜 곳에 왔으면 예쁘게 그곳을 가만 두고 가야지, 예쁜 것을 찾는 사람들이 마을을 어지럽힌다”는 지적이다. 특히 선인장 군락을 따라 걷는 해안 산책로에 쓰레기가 많다. 마을 사람들이 조를 짜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게다가 관광객들이 와서 선인장을 함부로 만지다 가시에 찔리면 그것을 빼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주민들이다. 제주도와 국가가 조금 더 지역에 알맞은 각각의 매뉴얼로 지금의 환경을 보존하고 마을 주민들의 농업활동을 지속적으로 보살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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