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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 걸까?

2017년 06월 05일(월) 10:36
제주의소리 news@jejusori.net

[BOOK世通, 제주 읽기] (57) 악셀 호네트 『사회주의 재발명』 /서영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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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사회주의 재발명』 문성훈 옮김. 2016, 사월의책.
악셀 호네트는 세계적 명성을 가진 사회철학자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 School)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비판이론’의 공식적 계승자이기도 하다. 선배인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의사소통합리성(우리가 간혹 사용하는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이 개념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인정(recognition)이론을 발전시켜 현시대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철학적 작업을 해 오고 있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인정투쟁』은 벌써 번역되었고,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와의 지상논쟁도 『분배냐, 인정이냐?』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회주의’를 들고 나왔다. 원제가 <Die Idee des Sozialismus>니 ‘사회주의의 이념’으로 직역할 수 있는 책인데 지난 30년 가까운 시간동안 길바닥에 버려져 짓밟혔던 정치적 이념을 이미 그것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이론적 전통에 속한 노철학자가 다시 꺼내들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이다. 애초부터 비판이론이 사회주의적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정통’의 입장에서는 ‘이단’으로 보였겠지만 비판이론 1세대의 이론적 ‘투쟁’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었다. 비록 그들이 가진 이론주의적 편향이 스스로를 현실운동으로부터 격리시키게 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비관주의적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을 버텨내는 건 현실이 아닌 이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었을 게다.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대중문화에 대한 경멸, 그것에 대한 냉소와 비꼼,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에서의 논평이 그들이 도달한 최종 종착지였다. 

하버마스가 이러한 비관주의의 막다른 길을 벗어나기 위한 선택한 돌파구는 규범적 비판의 근거를 찾아 그것을 버팀목 삼아 정치적 낙관주의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언어적 존재로서 인간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의사소통합리성에 근거해 그것을 왜곡하는 사회현실을 비판하는 길이었다. 마르크스주의가 서있던 노동, 생산, 계급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표방했지만 그의 생각은 점점 더 사회주의의 그것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담고 있었던 실질적 비판과 미래사회에 대한 열망은 지속적으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근거한 절차적 민주주의로 환원되어 추상적이고 지루한 ‘학적 담론’이 되어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버마스의 학문적 명성은 높아졌다. 호네트는 이런 하버마스를 계승했고 학문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던 40대에 독일통일과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목격했다. 하버마스가 나섰던 사회주의로부터의 거리두기의 길을 더 멀리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 호네트가 사회주의를 다시 생각하자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호네트의 책에 대한 생각을 적으려 하니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우선 ‘사회주의’란 무엇일까? 한국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착각한다. 그건 공산주의와 같은 것이고, 종종 마르크스, 레닌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북한-종북 세력-좌파-사회주의를 연상해 낸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계보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실제로 공산주의와 헷갈리기도 하지만 사회주의의 이념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청빈과 노동의 규율로부터 시작해서 초기 자본주의의 흉포함에 도덕적 분노를 느꼈던 기독교적 사회주의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17세기 영국 혁명기 가장 급진적인 분파였던 디거스(diggers)를 이끌었던 제라드 위스탄리(Gerrard Winstanley)의 평등주의적 사상도 사회의적이었다. 우리에게는 예술가로 더 잘 알려진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박홍규, 『윌리엄 모리스 평전』(개마고원)을 보라]는 자율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낭만주의자, 또는 유토피아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공상적’이라는 비난을 들었던 협동조합운동가들도 넓게 보면 사회주의의 식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사회주의의 계보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자면 장석준이 쓴 『사회주의』를 참고하라.) 

도대체 이렇게 넓고 잡다한 ‘사상의 가족’을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왜 모두 함께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것일까? 호네트의 답은 다양한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모두 ‘사회적 자유’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적 자유만을 절대시할 때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대혁명이 구호 중 하나인 우애를 통해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다고 말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고 정치권력을 획득했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러한 사회적 자유를 경제적인 영역으로 국한하고, 현실에서 성취되어야 할 연대와 공감을 이미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가정하는 잘못(프롤레타리아트는 본성상 혁명적이라는, 선험적으로 특권을 부여하는 관념론적 생각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그리고 국가가 혁명의 주체가 되어 버리는 국가주의적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도 잊지 앉는다. 

이번에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보자. 어찌 보면 우리에게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과 같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원리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것은 고단한 삶이요, 열망하는 것은 지금의 ‘고단한’ 삶보다는 나은 상태일 뿐이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면서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모였던 노인들이라면 나이가 들어도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그럼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 나온 중/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몸과 마음을 모두 피폐하게 하는 입시만을 위한 교육, 단 한 번의 기회로 인생의 경로를 결정하고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경쟁체제에서 벗어나 놀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상태일 게다. 20-30대 청년이라면 국가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의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시장맹신주의를 넘어 최소한 인생을 계획하고,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쥐어짜서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원할 것이다. 40-50대 장년층이라면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재정적 부담과 자신들의 노후를 대비할 여유가 없는 조건에서 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거주할 집을 갖고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향유하며, 아플 때 돈과 상관없이 치료받고 생존에 필수적인 기본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이 모든 것은 ‘상식적’이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권리이며 ‘인권’이라고 불리는 우리시대 보편담론이 담고 있는 지극히 정당한 바람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이렇게 상식적이고 정당한 요구들을 묵살하고, 억압하고, 배제한다. 자본주의적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식적이고 정당한 바람들을 이념적인 차원에서는 허용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부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제적 부정이 모순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사회주의’라는 괴물을 불러낸다. 

이중적으로 역설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로 불리는 사회는 자유와 평등을 이념적으로 허용하지만 실제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자본주의가 부정하고 있는, 하지만 이념적으로는 허용하고 있는 그 상태를 갈망하지만 만들어진 정치적 주체로서는 그것을 ‘사회주의’로 부정한다. 이러한 ‘분열증’은 현실사회주의의 타락과 몰락, 그리고 더 이상 사회주의라고 불리기 어려운 북한의 존재에 의해 강화되기도 한다. 

이러면 어떨까? 사회주의라는 ‘제목’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들 모두가 열망하고 바라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그 사회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의 목록을 만들어 보는 거다. 꼭 제목이 있을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에 주눅 들어 당연하고, 정당하고, 상식적인 것을 입 밖에 내지 못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에 품고 있는 좋은 삶, 행복한 삶, 만족스러운 삶의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해 보는 거다. 서로 다르지 않을, 그래서 겹쳐질 생각들 말이다. 

교육받고 훈련받은 것과는 달리 ‘나’의 행복은 경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행복은 곧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호네트가 ‘사회적 자유’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호네트가 여전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적 토대 위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규범적이고 원칙적인 입장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필자의 개인적인 불만은 중요하지 않다. 호네트의 책은 살과 피를 갖고, 몸으로 느끼고, 감정을 갖고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라고 열망하는, 하지만 아주 평범하고 상식적인 소망들,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라고 표현되어왔던 어떤 것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에도, 아니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것만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라는 이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사회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현실이 따라가야 할 ‘이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일 뿐이다.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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