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12) 호박네 식구 / 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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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박. ⓒ 김연미

씨앗 하나 심었더니
초록 우산 들고 온 식구
나눠 마신 물 반 컵에도 감지덕지 떡잎을 펴며
며칠 밤 두고 본 사이
한 매듭을 올린다
 
공한지 땅값조차
수직상승 한다는 요즘
과수원 돌담 위를 더듬더듬 거리더니
봉긋한 애호박덩이가
출산일을 알린다  

- 한희정 [호박네 식구] 전문-

이야기의 초점을 아무래도 땅값 상승에 맞추어야 할 듯하다. 어느 때든 만만하게 고개 숙인 적 없던 땅값과 물가였지만 지금에 비한다면 5, 6년 전만 해도 한량이었다. 돈 좀 모으면 어디 저 중산간 지대에 가서 농사 지으며 살고 싶다는 희망이 전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희망은 허공에 붕붕 뜬 구름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다는 꿈은 아예 꾸지도 않았다. 올라도 너무 오른 땅값의 그 꼭대기를 아무리 고개 빼들고 보려 해도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의 다양성은 땅에 대한 소유개념을 없애버렸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한 곳에 발붙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되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뭔가가 우리 대에 와서 끊긴 듯한 허전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다가는 어쩌면 우리 대(代) 아니, 우리 후대손들은 뿌리도 없이 물 위를 떠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의 다른 발현일지도 모르겠다. 

한 뼘도 안되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나눠 마신’ 반 컵의 물에도 ‘감지덕지 떡잎을’ 펴는 건 이런 상실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의 나약하고 남루한 모습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서든 발 붙일 곳이 있다면 싹을 틔우고 씨앗을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행히 제 몫으로 겨우 얻은 발아래 흙을 넘어 팍팍한 돌담을 기어가서라도 튼실한 열매하나 남기고 있는 것은 이들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것이지만, 저 짙은 녹색의 표정에 담긴 결기 또한 놓칠 수는 없다. 절대 뿌리 뽑히지 않으리라는...

돌담 위 호박 한 덩이에서 ‘공한지 땅값조차/ 수직상승’하는 현실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이 유월의 햇살보다 더 따갑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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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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