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59)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 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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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 저, 『감시와 처벌』, 오생근 역, 나남, 2003년.

1. 청년들의 고통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대략 한 달이 지났다. 청년 일자리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대통령 나름대로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보여 다행스러운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의 모든 청년들을 중동으로 보내자며 해맑게 미소 지었던 전 대통령 밑에서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견디어 온 청년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들에게 숨 쉴만한 공간을 만들어 주길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공일자리 몇 십만 개를 만드는 것으로 청년들의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보다는 실업문제로 인한 고통이 완화될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정책들이 성공한다면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라든가 노동현장에서의 불평등과 차별 등의 문제도 많이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공약이 실행되고 성공하더라도 여전히 많은 청년들이 취업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지나친 노동 강도와 긴 노동 시간에 시달릴 것이고, 결혼, 출산, 육아, 내집마련, 노후대책 등등의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면 ‘적폐’를 청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권력기관과 공공기관의 부정, 부패, 권력남용 등을 처벌하고 그런 일들이 재발하지 않게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은 긴 싸움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인내심 많은 청년들은 아마도 민주주의를 위한 긴 싸움을 위해 당장의 고통을 더 참아낼 것이다.

그런 착한 청년들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정치적 과정이 지루하고 답답하게 여겨진다. 필자는 매달 인문학 관련 책을 읽고 와서 토론하는 독서모임을 갖고 있다. 이런 인문학 독서모임에 대해 언론사에 입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한 학생은 ‘사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 학점과 무관하고 또 딱히 자소서에 한 줄 쓸 만한 꺼리도 안 되는 사적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시간낭비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요즘의 세태에 잘 적응해서 바쁘게 살아가는 학생들보다는 순응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독서모임에 남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독서모임에 참석하는 학생들이 시간을 낭비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 학생은 임용고시를 위해서 집을 떠나 노량진 학원가의 원룸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또 다른 학생은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길을 모색하고 있다. 걔 중에는 남들이 선망하는 회사에 입사했으나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고 퇴사해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도 있고, 간호사로 취직해 교대근무를 해야 하는 고된 노동환경 속에서도 시간을 내서 모임에 오는 졸업생도 있다. 

선생된 입장에서 이들의 착하고 선한 눈동자에 담겨있는 불안과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필자는 이들이 모두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그런 바람의 밑바닥에는 청년들을 끊임없는 경쟁의 고통에 내모는 사회를 만든 데 대한 미안함이 있다. 그런데 이 청년들의 행복을 위해 싸워나가야 할 대상은 단순히 부정부패를 일삼는 재벌이나 권력자가 아니라 그 보다 훨씬 큰 어떤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런 미안함을 다시 긴장감으로 바꾸어 놓는다.

2. 민주주의와 규율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오생근 역, 나남, 2003)은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암울한 분석을 담고 있다. 이런 분석은 민주적인 실천에 나서는 사람들을 어떤 면에서 매우 맥 빠지게 만든다. 촛불시위에 열심히 참석해 얻은 성과가  민주주의와 관련이 없다는 것인가? 푸코는 그렇다고 말하는 듯하다.

민주주의란 무엇보다 타율이 아닌 자율이 우선시되는 정치 공동체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대이후 진행된 사회변화의 과정은 개인의 자율성을 증대시키기보다는 개인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한 방식으로 자율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전개돼 왔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전제군주에 맞서 반란을 꾀했다가 잔인한 형벌을 통해 사형당한 다미엥의 죽음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군중이 모인 광장에서 거행된 그의 사형식은 가능한 한 최대의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이 인상적인 장면은 여러 화가의 작품으로도 기록되었다.

다미엥의 처벌은 단순한 법적인 절차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인 퍼포먼스로서 지배군주의 물리적 권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야만적인 폭력은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인도주의적인 처벌로 대체된다. 근대국가는 이성의 발달을 통해 진리에 다가감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인 이상에 토대를 두었다. 인간의 신체에 가해졌던  물리적인 처벌은 감금형으로 바뀌었고, 사회적인 규범을 어기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할 이성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를 통제하고 이용할 목적으로 계발된 이성이 인간 자신을 통제하고 규율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이성은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는 능력이다. 이성이 사회적인 규범의 문제를 판단하게 되면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구분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다.

특히 그 사회가 효율성의 가치를 최우선적인 가치로 여길 경우 그 가치에 반하는 인간에 대해서 이성은 가차 없이 비정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렇게 되면 이성은 진리와 관계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무엇을 용인하고 무엇을 배제해야 하는가를 판가름하는 원리로서 작동하는 일종의 권력이 된다. 이 이성적인 권력은 그런 억압과 배제의 규칙을 만들기 위해 지식을 창출해 낸다. 권력과 지식은 서로 관여하면서 사회의 재생산을 주도한다.

이 권력이 전근대적인 전제군주의 물리적인 폭력보다 무서운 이유는 각자가 이 권력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나를 억압하는 힘이 가시적으로 저 바깥에 존재했지만, 근대화가 진척된 이후에는 그 힘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나를 억압하고 통제한다. 양심, 상식, 정상적인 가치관, 건전한 사교성 등과 같은 모든 좋은 의미의 어휘들이 나로 하여금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게 하며, 주변의 사람들과 충돌하지 않는 성격을 형성하게 한다. 비정상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해야 하고, 허리를 곧추 세워야 하며,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푸코는 우리의 신체말단에까지 미치는 이런 권력의 작용을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고 부른다. 

제도에 의해 포섭된 개인은 외부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발적인 욕망에 의해서 기계장치의 부품처럼 조직된다. 학교에서 개인은 ‘학습장치’의 일부로서, 공장에서는 기계장치의 부품으로서, 병원에서는 효율적인 치료를 위한 일종의 치료도구로서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 개인들이 규율하는 권력에 의해 훈육당한다는 점에서 학교, 병원, 감옥, 공장, 회사 등은 모두 동일한 성격을 가진 근대적 기구인 셈이다.

청년들은 소위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부패한 권력자가 갇혀 있는 독방보다 작은 고시원에 스스로를 가둔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스스로 가두게 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과 싸워야 한다. 푸코는 그런 싸움이 자신의 양심이나 이성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애초에 불가능한 싸움이라고 보았지만, 그렇게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사치스런 독서모임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들이 존재하는 한 희망을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되뇌는 것이 필자가 할 수 있는 전부이지만, 민주적인 정부의 노력이 충분히 오래 지속된다면 더 큰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으로 믿는다. / 이유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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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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