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제주문화포럼 이사 한승훈 

과거 개발 시대의 도시 정책은 가능하면 많은 인구를 수용하고 보다 순조로운 물류 흐름을 위해서 도시 구획은 바둑판처럼 네모나게, 도로는 반듯하게 직선화가 되었다. 신제주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기대한 대로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빌라와 아파트가 들어선 대규모 주거 지역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팽창된 도시의 옛 모습과 이면과 주변을 ‘들여다보는 시대’가 되었고 도시 정책도 그에 맞춰서 보존과 재생이 큰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제주는 짧은 시간에 경제 성장을 하다 보니, 한쪽에선 급속하게 옛 모습이 사라지고 다른 한 쪽에선 옛 모습이 개발과 보존이라는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아직 제주에는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발만 나서면 고층 건물이고, 한 발 골목 안은 올레인 곳이 제주시다. 제주시의 도시 정책은 개발이냐 보존이냐 선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추려는 유연함과 순발력이 필요하다. 

제주시의 주거환경관리사업이 상황에 맞추지 못한 무기력하고 관행적인 정책으로 갈등과 몸살을 앓는 마을이 있다. 화북1동 4086-1번지 일원의 약 28,504㎡의 규모의 주거지역에서 시행되는 ‘제주 NEW 삼무형 주거환경관리사업(화북금산지구) 정비계획(안) 수립 및 정비구역(안)’이란 사업 때문이다.

사업내용을 보면 첫째 환경개선 정비계획 수립 및 정비구역 지정, 둘째 도시기능 회복하는 기반시설 정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역특성을 살린 주거환경관리사업 정비계획 및 단계적 실행방안 수립으로 되어 있다. 사업설명은 환경 정비와 개선 위주로 장황하게 설명하나 실제 내용은 주거 상황과 지형의 고려 없이 그냥 획일적인 십자형 바둑판과 같은 도로를 개설하는 것에 불과하다. 제주시가 제시한 항공사진의 위치도를 보면 그 내용이 명확히 들어나 있다. 

해당 마을은 화북포구와 서북쪽으로 접해 있으며 그 쪽으로 올레길 18코스와 만난다. 이 마을은 옛 길, 올레 등으로 이뤄진 정겹고 아름다운 골목 그리고 전통 가옥과 우영팟 등 옛 정취가 남은 제주시의 몇 안 되는 마을 중 하나이다. 화북포구는 주위가 기존 부락으로 빙 둘러 싸여져 있고 옛 길과 골목길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포구진입이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다. 해당 지역의 길이 직선화되고 대형화된다면 포구를 둘러싼 옛 길과 골목들 정취가 깨져 버린다. 

사업지역 안에 작은 아파트 한 채, 빌라 두 동이 건립되어 있고 한 채의 빌라가 신축 중이지만 마을의 정체성을 훼손할 만한 정도는 아니고 기존 도로와 삶의 규모에 맞춘 그래서 시대 변천에 따른 주거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 사업의 근거가 되는 바둑판 모양의 예정도로는 1976년 지정된 것이다. 그 시대의 개발 논리로는 타당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40년 세월이 흘렀다. 당연히 도시 정책도 변해야 한다. 요즘은 도심 재생도 개발의 한 축이 돼서 다시 옛 모습으로 살려내고 있는 곳이 많다. 화북동의 도로가 40년 전의 도로 상황도 아니고 이미 주변이 잘 정비 되어 있다. 손대지 말아야 할 부분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은 채, 계획된 것이니 그냥 가자는 것은 안일한 개발정책이다. 서울을 비롯한 국내외 선진 도시들은 도시의 기존 특성들을 무시한 획일적인 정책들을 수정하고 폐기한 지 오래됐다. 사업 추진이 좀 늦더라도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대안을 제시하고 설득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여 제대로 된 정책들로 호평을 받고 관심을 끌어 사람을 모으는 선순환의 예들을 우리는 많이 본다.

제주시는 40년 전의 도로 계획을 그대로 실행할 것이 아니라 그래도 이 정도 나마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음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옛 모습과 현 시대의 요구를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제주의 집들은 올레로 연결되어 있고 집안은 안거리, 밖거리, 우영팟 등 작은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다. 한마디로 작고 조밀하지만 기능적이다. 이것이 제주 스타일이고 지금 말하는 휴먼 스케일이다. 

이런 제주적인 특성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40년 전 개발시대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 도시계획안을 아무런 고민도 없이 제시한 주민공청회는 일방적인 사업 내용의 통보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주민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의도 없이 사업에 필요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40% 가량의 주민들은 토지 보상비를 수령한 상황이지만 보상받은 토지는 주차장이나 공원으로 만들면 된다고 사업을 당당 그만두라고 호통 치는 주민도 많다.  

해당 사업지역의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의 일부는 이미 도로가 직선화, 대형화가 되어 있는데 굳이 포구 앞 이 지역 까지 바둑판 모양의 도로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해당 지역 주변엔 옛날 길, 신설된 도로, 골목 그리고 올레 등 참 길이 많다. 여기에 40년 계획된 것이라고 또 길을 낸다면? 그 길이라 해야 기존 길옆에다 직선화된 큰 길이 하나 더 놓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정말 정신 사나울 정도로 길만 많아진다. 이 사업지역의 남동 꼭짓점은 현재 오거리인데 사업이 실행되면 육거리가 된다. 

혹시 신설도로가 소방도로의 기능도 고려한다면 그것은 단견이다. 6미터 폭의 이면 도로는  어차피 한쪽 길은 주차장화 될 수밖에 없다. 그것보단 이미 보상을 해준 40%의 땅을 주차장으로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업이 진행된다면, 가장 큰 문제는 화북 포구를 둘러싼 기존 옛길, 골목길 중에서 서북 방면의 포구 진입이 직선화 대형화되어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역사마을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 땐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다.   

길은 통과의 기능도 있지만 만남과 소통의 기능도 있다. 정책 입안자들께서는 부디 이 동네를 한번 걸어보시라. 아침에 걷고 저녁에도 걸어보시라. 그리고 주민들과 이야기해 보시라. 그래서 40년 전에 그려진 계획서의 남은 공간을 숙고 없이 허물지 말고, 그 공간을 소중히 여겨 지켰다는 평가를 받도록 제대로 결정하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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