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13) 접시꽃/ 박권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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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시꽃. ⓒ 김연미

낮달을 이마에 올린 수녀원 담을 따라

오후의 기울기가 쓸쓸해진 네 시 무렵

금이 간 그리움처럼 빈 접시가 붉었다

바람의 무게중심이 바뀔 때마다 휘청

받쳐 든 절대고독 반쯤 쏟다 남은 자리

또다시 붉게 고이는 여름 적막 한 접시

-박권숙 <접시꽃> 전문-

담장 너머 붉게 핀 접시꽃, 오후 네 시, 바람 한 줄기, 세 개의 소재를 가지고 절대고독의 적막을 표현해내는 것은 시인이라 가능할 것이다. 고수들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법, 바람 한 줄기 지나갔을 뿐인데, 절대고독과 적막이 새로운 차원의 우주를 만들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후 네 시를 넘어가고 있다.

늘 그랬다. 평범한 소재들이 시인의 가슴을 통과하고 나면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우리를 낯설게 하고 설레게 하고, 말문 턱턱 막히게 했다. 낮은 담장 위로 길쭉하게 키를 늘이고 서서 나를 바라보던 접시꽃. 그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이 전해오지 않았는데, 시인과 접시꽃 사이에 어떤 점이 서로 통했던 것일까. 내게는 쌀쌀맞기조차 했던 접시꽃이 고수의 시인 앞에서는 그 속내를 다 털어놓고 있다.

지금은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도종환님의 <접시꽃 당신>을 가슴에 품었던 적이 있다. 아픈 아내를 위해 가슴 절절한 사랑을 노래했던 그분의 시를 읽으며 그 절망적 사랑에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던가. 그 때 이미 ‘접시꽃=도종환’이라는 공식이 성립해 버린 것. 나는 물론이거니와 어느 누구도 그 공식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박권숙이라는 시인에 의해 이렇게 접시꽃의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접시꽃에 대한 시인의 생각의 깊이가 어디까지 내려가 있는지 아직 그 끝을 다 알지 못한다. 오후 네 시 바람 한 줄기 불어오는 순간을 골라 ‘절대고독’ ‘반쯤’ 쏟아버린 모습으로 이웃집 담장에 서 있는 꽃을 오랫동안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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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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