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14) 하눌타리 / 김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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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눌타리. ⓒ 김연미

하얀 달빛 아래 하얗게 물든 꽃송이
새벽 산책길 쫓아 툭 떨어지는
간밤에 앞집 아저씨 푸념처럼 아픈 꽃.
무슨 서러움이 그리도 많았는지
아프게 아프게 갈래지며 꽃이 필까
하얗게 밤을 지새도 다 하지 못한 말처럼

-김미향<하눌타리> 전문-

하얀 달빛, 하얀 꽃송이, 하얀 밤이 아픔에 귀결된다. 창백하고 창백한 하눌타리의 표정이 서늘하다. ‘간밤에 앞집 아저씨 푸념’이 ‘밤을 지새’며 이어지고, 그 푸념에 담긴 아픔은 꽃잎의 끝을 갈래갈래 찢어놓고 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툭 떨어’져버린다. 아픔을 대하는 저 간결하고도 명쾌한 자세.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제 안의 바닥을 확인하고 나서면 저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아픔 없이 피어나는 꽃이 어디 있을까마는, 제 몸 갈기갈기 찢으며 피어나는 꽃의 아픔을 어디에 빗댈 수 있을까. 곱슬곱슬 말려 올라간 아픔의 끝자락이 감성의 끝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불같이 타오르는 한여름의 열기를 대하는 꽃의 자세는 두 가지다. 저도 덩달아 열정적이거나 제 속으로 더 깊이 천착해 들어가거나. 하눌타리는 7,8월에 하얀색 꽃을 피운다. 제가 아닌 다른 것들의 몸을 타고 제 몸을 일으키는 넝쿨식물이다. 나무를 타고, 혹은 돌담을 타고, 어디든 손 뻗은 그 곳에 터를 잡고, 뿌리 내린 그 곳에서 방울방울 물처럼 꽃을 피우다 동그란 열매를 매단 채 이파리를 거둔다. 

남의 몸 빌어 제 몸 일으키는 게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인가. ‘하얀 달빛’ 아래에선 저도 덩달아 하얗게 물들고, 밤을 지새며 푸념을 해도 꽃잎의 끝을 찢는 아픔이 어지럽게 엉킨다. 결국 우리 삶도 저 하눌타리와 다를 바 무엇인가.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겨우 남의 몸 빌어 꽃송이 하나 피워내었다 하더라도 꽃잎에 맺힌 아픔은 숨길 수 없다. 그러나 그 아픔이 담겨 있기에 꽃은 더 슬프고 아름다운 것. 

갈래갈래 갈라진 꽃잎의 끝에서 ‘앞 집 아저씨 푸념’ 같은 아픔을 읽어내고, 하얀 꽃잎에서 ‘밤을 지새도 다 하지 못한 말’을 듣는 시인의 눈과 귀가 놀랍다. 자연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귀를 열어둔 자 만이 느낄 수 있는 귀한 감성이리라.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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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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