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27) 남의 집 머슴과 관장 살이는 끓던 밥도 두고 간다

* 놈의 집 : ‘남의 집 사는 사람’을 줄여서 이르는 말
* 집광 : 집과, 집하고 (‘광’은 조사 ‘과, 하고’의 제주방언)
* 관장(官長) : 지난날, 시골 사람들이 고을 원을 높이어 일컫던 말 
* 사린 : 살이는 (예 : 타향살이 머슴살이)
* 괴다 : (솥이나 냄비 속의 물이 섭씨 100도 이상에서) 펄펄 끓다
* 두엉 : (그대로) 두고

항상 하라는 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머슴과 관리는 다 익는 밥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하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을 원님인 관장을 주인에 매여 사는 남의 집 머슴에 빗댄 것에 주목하게 된다.
  
예전, 사내종을 종복(從僕)이라 했고, 지체 높은 사람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를 시녀(侍女)라 했다. 지금도 수직·수평 관계를 떠나서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부하,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을 심복(心腹)이라 한다. 심복지인(心腹之人)의 준말이다. 
  
이런 관념에서 자연스럽게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컬어 ‘공복(公僕)’이라 한다. 국민에 대한 봉사자라는 뜻으로 공무원을 이름이다. 달리 말해 공무원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라는 얘기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위해 성실하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해야 할 사람, 곧 공직을 수행하는 일꾼이다.

한데 그러해야 할 공무원이 실상은 그렇지 못해 지탄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문제다. 업무 미숙이야 내공에 시간이 지나면서 경력이 쌓이면 되는 것일 뿐 그런 게 아니라 여간 한심스럽지 않다. 음주운전, 불법 도박, 공금 횡령, 수뢰, 복지부동, 부하에 대한 폭언…. 특히 상관에 대한 교언영색의 도를 넘는 아부와 선거철 줄서기는 실로 가관인 게 현실이다. 자방자치단체장이 선출직이 되면서 목숨 걸고 나서는 비장한(?) 모습을 대할 때는 참 낯이 뜨겁다. 
  
이런 작태들이 공직 기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감투욕에 혈안이 된 자들에게서 공직 수행의 성실을 기대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우물에서 숭늉 찾기 격이 아닌가. 근래에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도를 넘는 금품 상납이나 향응 등의 관행에 철퇴를 가하고 있다고는 하나 과연 어느 정도 법이 현실 속에 정착되고 있는지, 그 영향력은 공직에 몸담고 있는 공무원들만이 체감하는 일일 테다.

행여 공무원이 주민 위에 군림하는 행태가 있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런 개념이 없는 자가 어떻게 공인으로서의 직무를 꾸려 나갈 수 있을까. 공직자의 비리가 도마에 오를 때마다 솜방망이나 휘두르고 마니 만날 그 버릇이 도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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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렴서약, 선서를 하는 제주도 공무원들. 하지만 그 약속들은 얼마나 지켜졌을까. (기사 내용과 사진 속 인물은 관련이 없습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나라가 밝아지고 있다. 어둡던 구석에 빛이 스며들고, 바르지 못하던 관행이 속속 바로 세워지고 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려는 공직자의 자세가 재확립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권력의 정점을 찍어 온 검찰에 대한 사정의 날 끝이 비켜가지 않고 있어 짜릿한 쾌감을 맛보게 된다.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법을 어기는 자가당착은 이제 더 이상 용납돼선 안된다. 나라다운 나라로 거듭날 것이란 기대가 큰 작금이다.

'괴던 밥도 두엉 간다' 함은 여차한 일이 아니다. 눈앞에 보글보글 끓는 밥도 그냥 놓아두고 길을 떴다 함 아닌가. 고을을 위해 하는 일만큼 절실한 게 없음을 구체적 행위로 여실히 보여 준 사례다. 예전 고을 원 시절에도 얼마나 공복으로서 투철했는가. 

하물며 오늘임에랴. 조선시대 도백(道伯)의 지위를 관찰사 또는 목민관(牧民官)이라 했다. 특히 목민관이라 함에 주목한다. 마소를 가꾸는 테우리처럼 백성들을 보살피는 관리라는 뜻이 녹아 있다. 먹을 싱싱한 풀과 풍족하게 마실 물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놈의 집광 관장 사린 괴던 밥도 두엉 간다”

속담 이전에 금언이다. 국민의 공복으로서 오늘의 공무원들, 마음속 깊이 되새길 일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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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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