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jnu.jpg
교육부가 내려 보낸 가이드라인은 대학의 교육과 연구 및 학생지도를 ‘비용’으로 명시하고 있다. 학생을 지도하고 교육하며 연구를 해야 하는 대학교수의 활동에 대한 지원을 ‘투자’로 생각하기 보다는 ‘지출’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출 또는 비용이기에 학생지도까지도 ‘건당’ 점수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비용’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돈의 논리, 경제적 논리에는 도덕과 윤리가 없다. 오직 숫자만이 있을 뿐이다. 내용과 질보다는 어떻게 하든 수치로 표현되는 ‘결과’만 채우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참한 현실이다. 이제 교수들은 학생을 지도할 때 건당 얼마를 받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많은 교수들이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다. 그리고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도덕적으로 고매한 사람들이 아니다. 학생과 상담할 때 학생은 ‘고객’이다. 그 학생과 상담한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할 때 건수가 올라가고 이에 따라 점수가 부여되고 그만큼 돈이 들어온다. 이것이 교육부가 말하는 교육의 질일까? 이제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동료 교수들과 경쟁해야 한다. 이것이 교육부가 말하는 효율성일까? 

대학은 이렇게 무지막지한 시장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부끄럽지만 가이드라인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정부가 틀어쥐고 있는 돈줄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면서 ‘알아서 기는’ 것이 한국의 대학들이다. 정부와 언론은 대학교수집단의 부도덕함을 선택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대학의 기업화, 시장화가 어떤 파국적 효과를 가져 올 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는 봉쇄한다.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원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제도로 고착시키고 그것을 시장에서의 자유와 동일시 한 것은 독재 시대 대학을 대학답게 했던 ‘학생’들이었다. 이제 혈기방장하고 비판적인 학생 ‘티’를 벗고 기성세대가 되어 소위 정치엘리트로 진입한 세대는 안정을 택한다. 소박한 삶에서 높은 정신이 나온다고 했던가. 기성세대가 되어 가진 것이 많아진, 민주화 시대 ‘(3)86 세대’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데 앞장선다. 

청년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서 보수화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86세대는 나이 들어감에 따른 보수화 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뒤이은 세대가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저항적일 수 있는’ 사상의 자유를 원천봉쇄했다. 총과 칼, 군대와 경찰을 통해 억압한 것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라고 치켜세워진 경쟁과 능력에 따른 보상의 원리를 교육 체제 안으로 촘촘히 침투시킴으로써 학생들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착각에 빠져 있다.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대변자라는 심각한 착각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그 세대의 사람들이 학위를 따고 대학의 교수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이 대학에 진입하던 바로 그 시기가 앞에서 이야기한 대학의 시장화, 대학의 기업화가 가속화되던 때였다. 당연히 앞선 세대가 누렸던 교수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교수라는 직함에 따라붙는 명예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학문적으로 따라야 하는 스승으로서의 의미는 사라졌다. 돈이 숭상 받는 시대에 그런 것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앞선 세대보다 공부는 더 많이 했다. 하지만 학문적 연구가 더 깊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소위 한 우물을 파는 것은 비용에 비해 산출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연구는 누군가에게 보여 져야 했다. 학문적 토론을 위해 읽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을 양적으로 나타내 줄 수 있는 ‘업적’이어야 했다. 깊이 있는 공부는 이러한 경력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규격에 맞추어진 비슷비슷한 내용의 논문들이 ‘가공’ 된다. 학문이 의미를 갖기 위한 현실과의 대화도 불필요한 비용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왕이면 양적으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영어 논문에 집착한다. ‘글로벌 지식장’에서의 경쟁이라는 그럴듯한 변명까지 붙여가며 지식상품을 가공하는 ‘단순’ 노동에 종사하고 있음을 숨기려 한다. 

175034_199328_3504.jpg
▲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결과는 분열적이다. 스스로를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정치적 좌파라고 생각하지만 몸은 언제나 현실순응주의로 기운다. 고통스러운 읽기와 사고, 스스로의 사고를 깨트릴 수도 있는 현실과의 조우는 가능하면 회피하고 학문적인 전문성을 핑계로 작고 세부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피하면서도 학문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주제들로 침잠해 들어간다. 자본주의라는 질서를 바꾸겠다는 것은 젊은 날의 객기 정도였을 뿐이다. 스스로를 위로한다.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겠다는 바람을 버린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 이 글은 한국대학학회가 발행하는 <대학: 담론과 쟁점>에 게재됐던 '비판정신의 실종과 민주화운동 세대의 이율배반'을 재편집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