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67) 천정환 『대중지성의 시대』 /서영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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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정환의 『대중지성의 시대―새로운 지식문화사를 위하여』 (푸른역사, 2008)
나는 습관적으로 책을 산다. 구입한 책의 20-30 퍼센트만 읽었으면 세계적 석학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당치 않은 생각을 할 때가 있을 정도다. 천정환의 『대중지성의 시대』도 그렇게 습관적으로 ‘배달 된’ 수많은 책 들 중의 한권이었던 것 같다. 언제 왜 샀는지도 기억조차 나지 않으니 말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08년 말이니, 아마도 2008년 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시위가 촉발한 ‘집단지성’ 또는 ‘대중지성’에 대한 관심에 저자에 대한 개인적인 친분이 더해져 나의 서가에 꽂혀 있게 되었을 거라는 어렴풋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족히 8-9년 동안 잊혀 있던 책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책을 다시 꺼내 펼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며칠에 한 번씩 서가를 훑어보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습관적인 ‘의례’에 이 책이 ‘선발’된 것이다. 하지만 지난 8-9년 동안 수없이 나의 시선 아래 있었을 이 책이 갑자기 서가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최근 들어 깊이 생각하게 된 지식의 문제, 소위 전문가들의 특권으로 전락해 버렸고, 그래서 그들의 돈벌이 수단이 되어 버린 지식의 문제 때문이었다. 이제는 거의 환경적 재앙이 되어버린 ‘4대강 사업’을 ‘학술적(?)으로’ 옹호했던 수많은 전문가들의 위선에 (그것을 막지 못했던 대학의 구성원이기에) 내 자신도 동참했을 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짓눌러 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대체 지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의 근거와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이제는 ‘황우석 사태’라고 기억되는 과학 스캔들의 연루자가 고위 공직자에 추천되면서 벌어졌던 과학계의 분란이 이런 반성과 회의를 더욱 깊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 그뿐이랴.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에서 최근의 살충제 계란까지 전문가들이 포진한 정부가 설정해 놓은 ‘과학’의 기준을 통과한 지식이 그들이 비과학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대중’의 직관에 미달하는 사태를 지속적으로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합리적인 토론보다는 자신들이 독점하는 ‘정보’를 근거로 대중,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 조차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원자력 분야 학자들은 또 어떤가? 대학은 민주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지만 자신이 속한 분야만은 소수의 담합 아래 놓아두려고 하는 지식의 ‘반민주주의자들’의 소굴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울 정도가 되어 버렸다.   

『대중지성의 시대』의 저자가 인용한 저명한 사회학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세계 석학들이 인정한 연구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도 놀랍거니와, 방송 전문가가 과학세계를 헤집고 다닌 과욕과 무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PD수첩’의 담당자는 DNA가 나선형이라는 정도는 알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명의 신비를 뿜어내는지 취재만 하면 다 밝힐 수 있다고 자신했는가?.....
더 심각한 것은 대학의 ‘사회적 사망’이다. 이 사건은 대학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기초를 정면으로 부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불길하다. 담당 PD가 의혹을 확신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지적 생산의 경비대인 학계로 과제를 건넸어야 했다. 왜 과학의 문외한인 그가 직접 실험 가운을 입고 나섰는가? 황우석 교수를, 연구팀을, 나아가 대학의 연구기능을 점검하고 직접 결과를 내고 싶었는가? ‘PD수첩’의 행위는 탱크를 앞세워 대학을 점령했던 군부정권보다 더 ‘군부적’이다. 군대는 적어도 연구실 외곽에 진을 쳤지만 ‘PD수첩’은 연구실 내부까지 과감하게 진입했다. 연구자, 실험결과, 시료, 방법 등을 일일일 점검했으며, 성과가 가짜가 아니냐고 다그치기까지 했다.”(71쪽에서 재인용)

이 짧은 인용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저자인 천정환도 그랬던 것 같다. 이 저명한 사회학자의 진단과는 정 반대로 ‘대학의 사망’은 오직 대중의 정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을 과학의 지표로 삼는 그와 같은 학자들이 앞장서서 초래한 일이다. 읽고 쓰는 것, 그리고 교육을 받는 것이 특권이었던 시절, 민주주의가 결핍되어 있던 시절, 대학의 지식인들이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지식추구의 자율성을 요청하는 것은 학문을 추구하고 중립성을 지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이 책의 저자와 같은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증명하고 있듯이 대중은 조금씩 자신들의 집단적인 역량을 발전시켜왔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표현을 빌자면 대중은 ‘기나긴 혁명’(the long revolution)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학 강의실과 연구실에 웅크리고 앉아, 도저히 대중과의 소통이 불가한 난해한 문자, 수식, 기호를 가득 찬 글을 쓰면서 그것이 무지몽매한 대중의 상식과는 반대편에 있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을 보증해 줄 것이라는 ‘환각’에 빠져 있기보다 똑똑해진 대중에게 그들이 연구하여 찾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공론장에서 검증받을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의 기준을 찾는 길에 나서야했지만 우리의 ‘전문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하는 것 자체를 ‘비과학’으로 매도하고 있다. 지식의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다. 근대초기의 지식인들이 (비록 과잉되기는 했지만) 낡은 권위와 인습을 비판하고 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는 데 기여를 했다면 우리 시대의 전문가들은 이미 낡아빠진 근대적 과학관에 빠져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대중의 역량을 뒤쳐진 적폐세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때 혁신적이고 진취적이었던 지식인집단은 이제 낡은 과거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않는 퇴행적 세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저 저명한 사회학자는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뻔뻔하거나, 무지하거나. 박사학위라는 증명서를 전문가라는 ‘상품’의 보증서 삼아, 대학 교수라는 직함을 ‘영업’의 수단으로 앞세워, 권력과 자본의 편에 서서 사실을 왜곡하는데 앞장선 수많은 동료 교수들을 보면서도 ‘대학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다면 무지한 것이다. 측은하기까지 하다. 이미 아무런 근거도 남아 있지 않은 가부장제의 미망에 빠져 남자의 권위와 가장의 위엄을 상실했다고 괴로워하고 분노하는 무지한 남성들처럼 말이다. 자신들이 지식을 퇴행시키는 세력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똑똑해진 대중을 과학과 지식의 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면 악랄한 선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냥 무지한 걸로 믿고 싶어진다. 그런데 만약 지식도 경쟁력이 있어야 하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본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대중과의 소통 대신 선택한 대학의 기업화를 옹호하기 위해 이미 사라져버린 대학의 중립성과 자율성 운운하는 것이라면 뻔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악의적 속내도 도저히 묵고하고 지나가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다. 

벌써 12년 가까이 지난 글을 가지고 트집 집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할 사람도 있을 법하다. 불행히도 전문가들의 퇴행적이고 낡은 사고방식은 그때보다 더 악화되었다. 그들이 가지는 지적 권위‘가 보잘 것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권력과 자본의 노예가 된지 오래되었다는 것이 기업비리와 국정농단에 연루되어 줄줄이 수갑을 차는 대학교수들을 모습을 통해 만천하게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집착은 더욱 심해지고 자기 것을 지키려는 집단적 이기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 책 『대중지성의 시대』가 검토하고 있는 ‘지식의 문화사’가 일제강점기에 그치고 있지만(사실 이 부분이 책의 3분의 2정도를 차지한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대중의 지적 역량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오랫동안 민중의 숨통을 죄어왔던 독재시절에도 이러한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대중의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되기도 하지만 개인이 아닌 집단이기에 대중은 조금씩, 중단 없이 앞으로 전진 해 왔다.

이제 우리는 대중지성의 폭발적 성장기에 살고 있다. 그러한 성장과 어울리지 않는 낡은 지식관, 소수의 전문가가 지식을 보증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고색창연한 생각이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역설 또한 직면하고 있다. 스마트한 대중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고 자기통치할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하고 배워가고 있는데, 그들에게 힘을 내어주고 싶지 않은 엘리트들이 낡은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 곳곳에서 그들의 세계관에 의해 통치되는 세상은 ‘인간답지 못하고’,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지만 낡은 세계관과 체계가 주는 권력과 부의 달콤함에 도취되어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선택할 때가 아닐까? ‘저들’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 파멸할지, 아니면 ‘우리’의 권력을 되찾아 ‘인간다움’을 구현할지. 이렇게 말해보자. ‘새로운 지식 문화사’를 넘어 ‘우리의 지식문화’를 열어젖혀야 할 때라고.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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