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18) 채밀 / 김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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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려니 숲길에서 만난 풍경. ⓒ 김연미

어떤 꽃은 밤에도 향기를 쏟아낸다

새벽, 벌장 가다 말고 힐끗 본 꽃숭어리
단물 다 빨렸는데도 꽃은 그냥 멀쩡하다

솔가지를 태운다, 오늘은 꿀 따는 날
꿀 한 모금 들락날락 부웅 붕 날갯짓 소리
수동식 채밀기 돌려 훔친 꿀을 훔쳐낸다

벌침 몇 방 맛봐야 꿀 한 통을 얻느니
내 안에 밀봉된 채 다독여 온 사랑아
종낭꽃 채밀의 시간
탈탈 털린 사려니숲

- 김영순, [채밀] 전문-

두 줄로 늘어선 벌통 위에 앉아 뚜껑을 열어 벌을 돌보는 모습. 몇 해 전, 사려니 숲을 걷다 본 풍경이다. 부부인 듯, 남편은 벌통에서 벌집을 꺼내 들여다보고, 아내는 옆에서 연기를 쐬여주고 있었다. 서쪽에서 넘어온 산그늘이 벌통이 있는 공터를 다 덮고 있는 시간이었지만, 바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듯 사려니 오름을 배경으로 그들은 오래도록 저녁 산 풍경이 되어 있었다. 

벌집에 꿀이 가득 들어차면 저 부부도 ‘채밀기를 돌려’ 벌이 꽃한테서 ‘훔친 꿀을 다시 훔쳐’낼 것이다. 탈탈탈 돌아가는 채밀기 아래로 진한 꿀 천천히 흘러내리고, 수천수만의 꽃과 수천수만의 벌에게 받은 꿀을 농부는 소중하게 받아들 것이다.
 
벌한테 쏘였다고 해서 그 자리가 부어오르는 사람은 아직 꿀을 딸 자격이 되지 못한 것이라 했다. 벌침이 꽂혔던 자리에 빨간 점 하나 생기면 그만, 벌이 주는 아픔을 온전히 몸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꿀 한 통’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얼마나 많은 벌침이 농부들의 가슴에 꽂혀야 그 독한 벌침을 그저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맘 때 사려니숲은 한여름 꽃들을 다 피우고 나서 가을꽃을 준비하는 시기다. 왁자왁자 피어나던 산딸나무같은 여름꽃과는 달리 층층이꽃, 섬잔대, 자주쓴풀, 물매화 같은, 땅 가까이 몸을 낮추고 풀숲에 조용히 피는 가을꽃. 벌들도 덩달아 낮은 비행으로 그들의 꽃술을 찾아 나설 것이고, 농부는 벌집에 꿀이 다 찰 때까지 벌들의 작업을 도울 것이다.

‘단물 다 빨렸는데도 꽃은 그냥 멀쩡하’고 제 방에 가득했던 꿀이 다 털렸는데도 벌은 여전히 꽃을 찾아 날아간다. 꽃처럼 벌처럼 당신이 가진 것 모두 다 주고도 또다시 벌통의 뚜껑을 여시던 아버지. 사려니숲에서 만났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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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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