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36) 가을 곡식 못 거둬들인 놈, 겨울 넘길 생각을 말라

*가실 : ‘가을’의 제주방언. ‘가실 것’은 가을 곡식

*저실 : ‘겨울’의 제주방언. 저슬〉겨울

*냉길 : ‘넘길’의 제주방언. 냉기다〉넘기다

예: 그냥저냥 저실 혼철을 냉겼져 (그럭저럭 겨울 한철을 넘겼다).


명령조로 단호히 잘라 말한다. ‘말라’고. 

다른 것하고도 다르다. 살려고 먹는 일, 입에 풀칠하는 일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더욱이 가을 들어 곡식을 거둬들이지 못했다면 참 힘들 것 아닌가. 그 춥고 긴 겨울이라는 계절의 터널을 어떻게 나랴. 늦가을, 겨울나기가 코앞으로 성큼 다가서니 이만저만 심각한 일이 아닌 게다.

어조로 보아, 농사지을 밭이 없어서는 아닌 듯하다. 농사를 지었음에도 가을걷이를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을 꾸짖는 소리로 들린다. 거둘 것을 거둬들이지 않고 놀면서 겨울을 나려는 것은 얌체 짓이라 함이다. 그러고서 ‘겨울 넘길 생각이랑 아예 하지 마라’고 했다.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를 떠올리게 된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늦여름 어느 날, 개미 가족은 땀방울을 줄줄 쏟으면서 열심히 먹이를 날랐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착착 발을 맞춰 가며….

개미들은 더운 여름부터 춥고 힘든 겨울에 대비해 부지런히 일을 했지만,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노래만 불러댔다.

어느새 겨울이 닥쳐왔다. 나무들은 앙상하게 가지만 남고 냇물은 꽁꽁 얼어 버렸다. 베짱이는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애고, 힘이 없어 노래도 못 부르겠네."

개미들이 베짱이에게 먹을 것을 나눠 준다.

"미리 겨울을 준비했어야지." 개미의 말에 베짱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베짱이는 허겁지겁 먹고 나서 또 노래를 부른다. "열심히 일해야 해. 놀기만 하면 나처럼 된다니까." 옆에서 개미들이 깔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개미처럼 몸이 부서지라 일하며 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분명 열심히 일하는 게 중요하긴 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개미와 베짱이를 등장시켜, 부지런히 일해야만 성공할 수 있음을 비유한 동화다. 교훈을 동화 형식을 빌려 효과적으로 빗댔다.

베짱이는 개미와 함께 우리에게 친숙한 곤충이다. 날개 부위에 소리를 내는 발음부가 있어 왼쪽앞날개의 줄칼 모양을 한 부위에 오른쪽앞날개의 밑등을 싹싹 비벼대며 ‘찍찌르르 찍찌르르’ 하며 잘 울어댄다. 잡아서 애완용으로 기르기도 한다. 

우화에서 개미와 대비시켰다. 게으름과 나태함을 꼬집은 게 그럴싸해 흥미롭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김매러 다니며 들은 얘기다.

"아이고, 저 밭 보라게, 초불만 매고 두 불 검질을 안 매연 데껸 내부러시녜. 저 검질 왕상혼 거 뵈려 보라"
(아이고, 저 밭 보라. 초벌만 매고 두 벌은 안 매어 내던져 버렸네. 저 김 무성한 거 보라)

밭일 하러 바삐 오가는 사람들이 입방아를 잘도 찧었다. 마을 안에 게으른 사람이 몇 있었던 것 같다. 사정이 있어 한 번 그런 게 아니라 매해 그런다는 걸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잡초가 우거진 밭은 보기에도 너저분해 어지러워 정신 사나웠다. 밭주인, 베짱이 같은 간새다리(게으름쟁이)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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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제주도 조밭에서 일하는 모자 모습. 출처=제주학아카이브.

가을에 거둬들이는 것인들 제대로 하겠는가.

어머니는 눈 내리는 겨울만 빼고 노상 밭에 살았다. 해 떨어진 들판을 가로질러 어둠 속에 우둘투둘한 농로를 더듬어 집에 돌아오면 물 한 바가지 떠 고냉이세수(고양이세수)로 흙 묻은 손 씻는 체하고는, 그제야 저녁밥 짓느라 무쇠 솥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그래선 다섯 식구 흙벽에 깜빡거리는 푸른 등잔불 아래 두레상 받고 앉아 곯은 배를 달래곤 했다.

당신은 개미처럼 부지런한 분이었다. 겨울철 짧은 낮엔 감저(고구마) 두세 개로 점심을 면하거나 바다에서 건져 온 톳으로 거친 밥을 지어 먹긴 했어도, 우리 네 오뉘들 굶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비록 가난을 사시장철 눌러쓰고 살면서도 남에게 먹을 것을 꿔 오는 일은 없었다. 

자라면서, 오히려 장려(식량이 모자라는 봄에 먹을 쌀 꿔 줬다 받은 일)를 주는 걸 알고 놀랐다. 먼 산촌, 그때는 구좌 송당은 ‘다리 송당(교래리와 송당리)’이라 해서 말 그대로 산간 오지마을이었다. 그곳서 친근하게 지내는 아주머니 한 분이 해마다 우리 집을 찾아왔다. 이른 봄에 왔다 초가을에 다시 오는 걸 가만히 살폈더니 사연이 그러했다. “삼춘이여.” 했지만 친족을 아니었다. 밖에 나가면 만나는 어른이 다 삼촌이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으리라.

먹을 것을 탈탈 털어내 바닥났던 춘궁기에 좁쌀 몇 두어 말 꿔 갔다 추수해서 갚으러 드나들던 그 걸음이었던 걸 나중에 알았다. 두 번, 세 번 거듭 놀라곤 했다. 이자(利子)로 두어 됫박 얹어 받았을까.

나를 뒤돌아본다. 어머니처럼 부지런하진 못했어도 그나마 당신을 닮았던지 게으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평생 부자 소리는 들어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아왔지 않은가.

“가실 것 못 걷어 들인 놈, 저실 냉길 생각 말라”

혹독한 질책인 것 같아도 게으르지 말고 한 치 앞은 내다보며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일깨우고 있는 목소리다.

가을에 거둬들이지 않고 어떻게 춥고 긴 겨울을 날 것인가. 어림없는 일이다. 일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앞에 다가온 난관을 어떻게 헤칠 수 있으랴.

예전처럼 농사짓고 추수하는 농경사회는 아니다. 그러나 제가 뿌린 씨앗을 거둬들일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세대들, 마음에 깊이 새길 일이다. 설령 개미처럼 쉴 새 없이 일하진 못하더라도 베짱이처럼 놀고먹어서야 쓰겠는가. 

우화에서는 개미가 먹이를 나눠 주었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시선(施善)을 바라선 안된다.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길은 단 하나다. 제 일 제가 하는 것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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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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