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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현장 그리고 사회의 장과 예술

2017년 09월 25일(월) 09:20
김준기 관장 news@jejusori.net
[BOOK世通, 제주 읽기] (69) 권미원 『장소 특정적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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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미원 『장소 특정적 미술 (One Place After Another)』 김인규, 이영욱, 우영아 옮김. 현실문화. 2013.
장소는 시간과 공간의 총합이다. 특정한 공간(Space)에서 겹친 시간(Time)의 누적을 우리는 장소(Place)라고 부른다. 따라서 장소는 물리적인 의미의 공간과 구분하여 어떠한 이야기가 담긴 곳을 뜻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 <장소 특정적 미술>에서 이야기하는 장소는 그런 장소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소는 플레이스(Place)가 아니라 사이트(Site)다. 사이트는 장소에 부여된 시간성의 의미를 좀 더 긴박하게 상황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니까 사이트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서 사이트 스페서픽(Site specific)하다는 것은 장소 특정적이라기보다는 현장 특정적이나 상황 특정적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낳았다.

필자가 서두에 이 문제를 언급하는 데는 나름이 까닭이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비평가, 이론가들이 이 장소 특정적이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창백한 공간, 화이트큐브의 한 모퉁이에다가 그 공간의 특성에 맞게 뭔가를 설치해놓은 작품, 그것도 관객과의 호흡이나, 시대정신과의 조응, 사회적 현실과의 대면과는 무관하게 그저 작가 자신의 사적인 관심사를 펼쳐놓은 작품에 대해 과연 장소 특정적이라는 말을 써도 되는 일일까?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듯 사이트 스페서픽(Site specific)이라는 말을 제대로 쓰도록 이 말의 의미와 맥락을 다시 살펴야 할 때다.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장소에 존재하는 창조된 작품’이다. 미술은 그 작품이 놓이는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작품은 화이트큐브 뿐만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 놓일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1970년대 이래 서구의 예술가들은 점차 특정한 장소를 염두에 둔 작품의 제작과 그 작품의 맥락에 관한 비평을 두고 장소 특정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일반화한 공공미술의 공공(public)에는 공공장소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는데, 이 때의 공공장소는 예술가들의 관심사가 아닌 일반인들의 관심사에 가까운 공공개념이라는 점에서 다소간 차이가 있다.

이 책의 필자 권미연은 서구사회에서 고민해온 현장성의 맥락을 정리하고 있다. “장소 특정성이란 용어를 미술 장르로서가 아닌 미술과 공간 정치학의 특유한 암호, 곧 문제적 아이디어로서 비판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즉, 비판적 도시이론, 미술과 건축에서의 공간과 정치 문제, 정체성 정치와 공공영역에 관한 논의 등 도시 생활과 도시공간을 조직하는 폭넓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과정들에 대한 문화적 매개로 재구성하고 있다. 1)1960년대 후반 이후 특정성의 계보를 제시하고, 2)고정된 장소로부터 유목적인 모델로서의 장소 변환이 오늘날 미술제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핀다. 3)미술작품의 공공성 관련성과 그것의 사회정치적 야망이 미술-장소 관계 측면에서 어떻게 평가되었는지 살펴보며, 4)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에서 장소 특정성으로의 내포된 의미를 찾아보고, 5)공동체기반 미술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며, 6)장소 특정성에서 장소가 소멸되는 것을 탈영토화의 역학과 연관지어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필자가 이 책을 꺼내든 이유는 장소 특정적 미술과 사회예술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기실 1980년대에 존재했던 전시장미술/현장미술이라는 대립구도는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미술관/갤러리미술과 사회예술이라는 양립관계로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이 이야기하는 ‘사이트 스페서픽’의 문제를 물리적 공간과 시간성, 그리고 현장성의 맥락에서 다시 살펴 사회적 장 개념 속에서 예술을 재구조화하려는 비평적 시도를 지속할 의무와 당위가 있다. 필자는 2013년에 <미술관속사진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한 <사진과 사회>라는 전시를 기획하면서, ‘사회(적)자본의 대칭 개념으로 ‘사회(적)예술’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 앞 해에 어느 미술관에서 소셜아트 개념으로 전시를 기획했지만, SNS 관련 예술을 소셜아트로 개념 규정한 것이라서 거리가 있었다. 필자는 공공미술을 사회예술로 대체하려는 건 아니고, 공공미술로 다 포괄할 수 없는 공동체예술이나 행동주의예술, 그리고 사회비판적예술을 관통하는 비평어로서 사회(적)예술을 사용하고 있다. 미술을 예술로 대체한 것은 부적절한 번역어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고, 또한 전형적인 미술, 시각예술의 규범을 넘나드는 예술을 포괄하려는 의도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공공미술이 한창 제도화의 길에 접어들어, 새로운 실험을 착종하기 위해 모두들 노력하던 2000년대 초반부터 예술의 공공성과 사회성은 고민거리였다. 돌이켜보면, “사회적 000”는 1970년대 무렵 또는 그 이전에 존재했다. 아메리카에서는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가 있었고, 독일에서는 보이스의 “사회적 조각(soziale Plastik)”이 있었으니, 사회적 예술은 낯선 것만은 아니다. 다만 2000년 이후의 한국에 나타난 예술에 나타나는 사회성을 어떻게 갈무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앞의 두 용어와 다소간 차이가 있다. 필자가 사회예술 비평에서 꼽은 비판예술, 행동예술, 공동체예술, 공공예술 등 네 가지 유형가운데 비판예술은 “소셜리얼리즘”과 가장 닮은 것이고, 나머지 행동, 공동체, 공공예술은 각자의 고유한 비평적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의 예술 이름들을 포괄하는 메타크리티컬 용어로 사회(적)예술이라고 읽어보려는 것이다. 그것이 200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고, 그 배경에 존재하는 1980년대 민중미술의 씨앗을 재해석하려는 생각도 있다. 한국의 예술 창작과 비평이 스스로 생장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론적 식민지형에 놓여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사회예술이라는 프레임이 동시대 한국 예술의 한 흐름을 읽어보는 데 유용한 하나의 제안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회예술이라는 잣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당대예술을 살피는 데 필요하다.. “퍼블릭아트”라는 개념에는 명확한 한계효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공공의 장소”에서 “공공의 재원”으로, “공공의 의제”를 다루는 예술이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주문생산”이다. 그것은 “(사회)비판(적)예술”의 뚜렷한 “자율생산”과는 판이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자율생산과 주문생산의 양극단에 존재하는 두 가지의 예술은 아이러니하게도 광의의 사회성을 포함하고 있다. 커뮤니티아트(community art)는 퍼블릭아트(public art)에 가깝다. 아무래도 현장(site) 특정적인 사회적 실천에 근접하니까. 반면에 액티비스트아트(activist art)는 퍼블릭아트와는 좀 거리를 둔다. 장소보다는 의제(agenda) 특정적인 예술적 실천에 근접한다.

따라서 장소 기반의 퍼블릭아트와 커뮤니티아트, 의제 기반의 액티비스트아트와 크리티컬아트가 느슨한 계열체로 읽힌다. 동시에 자율생산과 주문생산의 차원에서 보자면, 크리티컬아트와 액티비스트아트가 자율생산의 예술이라면, 퍼블릭아트와 커뮤니티아트는 주문생산의 예술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율생산과 주문생산의 구도는 “근대:전근대”의 구도가 아니라 “근대:탈근대”의 구도 속에 존재하는 근거다. 물론 이러한 비평적 근거가 명확한 획정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떨림과 움직임이 있는 관계이고, 더군다나 현재진행형의 일들이라 그 불명확성이 완연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예술흐름 지형도를 그려보기 위해서 이와 같은 잣대를 들이대 보는 것이다.

예술의 공공성이 제도화하면 할수록, “공공성과 자율성의 공존”이 중요하다. 다만, 자율생산과 주문생산의 문제는 앞서 제가 ‘근대:탈근대’ 구도라고 언급한 바처럼, 전근대적인 주문이 아니라 탈근대적 주문, 즉 새로운 주문을 전제한 것이다. 프랑스의 새로운 주문자 프로젝트라는 개념에도 이러한 고민이 녹아있다. 이제는 전근대적인 주문생산이 아니라 자율성에 근거를 둔 예술가 주체가 자발적으로 주문을 요청하고 수용하는 관계로 진화해야 한다. 하지만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자리 잡은 제도 속의 공공미술은 주문하는 주체의 윤리와 주문을 만들어 내거나 수용하는 주체의 윤리 모두 미성숙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게 문제다. 말 그대로 난제다. 공공예술의 제도화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키우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없는 공공예술 장에 대해 폄훼하며 거리를 두려고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 이 대목에서 필요한 것이 공공예술의 비평이며, 공공예술의 윤리다. 공공예술에 대해서 비평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관행이 없으니, 예술가들은 그저 주문자들의 거친 일방주의 논리에 대해 점점 거부감을 키워가고, 그 반대의 탈출구로 자율생산의 사적인 예술의 장(private art scene)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다. 이 책 <장소 특정적 미술>이 문제의식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예술의 과제들과 맞닿아있다. 예술을 통한 문화복지 개념이든, 문화개념으로 예술을 끌어안는 생활예술 개념이든 간에 예술이 특정한 현장을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서구사회의 경험치를 차분히 살펴 소개하고 있으니, 후기자본주의적 양상에 직면한 한국사회의 예술장에서 진지하게 경청할만한 이야기들이 여기에 있다. /김준기 관장

▷ 김준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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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관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홍익대 예술학과 학부 및 석사 졸업 및 같은 학교 미술학과 예술학 전공 박사과정 수료. <2016 부산비엔날레> 전시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예술과학연구소 대표 역임.

‘지리산프로젝트’ 예술감독(2014-2016), ‘프로젝트대전’ 총괄(2012,2014), ‘해인아트프로젝트 커미셔너’(2013) 등을 역임했다. 예술사회학적 관점으로 공공미술과 사회예술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지향하는 과학예술과 우주예술을 연구 및 기획하고 있고, 올해 처음 열리는 ‘제주비엔날레’를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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