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43) 있는 사람도 없을 때 있고, 없는 사람도 있을 때 있다

* 신 : 있는, 가진, 부유한, 여유로운
* 잇일 때 : 있을 때, 있을 적, 여유로울 적
* 싯곡 : 있고, 있는 법이고 . ‘싯다’는 ‘있다’의 제주방언
* 엇인 : 없는. ‘엇다’는 ‘없다’의 제주방언
* 싯다(있다)의 반대말은 엇다(없다)

좀 심한 말로, 망한 사람 뒤에 흥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슬픔 뒤에 기쁨이 오고 괴로움이 다하면 즐거움이 온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다. 섭리란 그런 것이다.
  
부자라고 장상 부자 아니요, 빈자라고 노상 가난 아니다. 그게 사람의 일이요 세상사란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려도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이치를 믿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좋은 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산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아침을 온다 했지 않은가.
  
특히 가진 것 없는 서민들. 가난만은 대물림할 수 없다고 이 악물고 농사지으며 자식을 교육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천에서도 용이 난다. 흙수저라고 성공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물도 조석 간만(干滿)이 있어 들고 싸고 한다. 가졌다고 떵떵거리는 건 제멋이고 자유지만 겸손해야 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 혼자 갖고 혼자 거머쥘 뿐 나누려 하지 않는 자, 그리 오래 누리지 못한다. 덕을 지녀야 한다. 덕은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 
  
덕은 삼대까지 간다, 그러나 부자는 삼대를 못 가고 빈자가 삼대를 안 간다 했다. 주먹구구식으로 한 말이 아니다. 모래 속에서 금을 찾아 내 듯, 탐색과 경험의 축적에서 나온 진리, 번득이는 지혜의 말이다.

"신 사름도 엇일 때 싯곡, 엇인 사름도 실 때 싯나."

아마도 우리 섬사람들에게 진이 박였을 법한 말이다. 제주사람들 심기 곧고 심신이 강건하다. 믿음에 허약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말 속에 굳건한 믿음이 녹아 있다. 믿음은 신념으로 더욱 강고해지게 마련이다. 
  
1950년대, 그 어려운 적빈(赤貧)에도 어찌어찌 고비를 넘기면 좋은 날이 있으리라는 소망을 간직하고 버텼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살다 보니 아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딸이 좋은 신랑 만나 팔자를 고치기도 했다. 인생 역전에의 꿈은 필경에 이뤄지고야 만다.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대중가요가 있다. 송대관의 〈해 뜰 날〉. 국민적 호응을 불러일으켰던 트로트 곡. 대중가요의 생명은 공감에서 오는 인기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이 노래가 한때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은 서민에게 대리만족을 준 데 연유할 것이다. 꿈이 있다, 그러니 슬픔, 괴로움 따위는 내 앞에서 사라져라, 노력해 안되는 일 무엇이 있겠느냐, 이제 우리 앞에 좋은 날, 신나는 날이 돌아온다, ‘쨍 하고 해 뜰 날!‘ 이런 노랫말이 대중의 의식 밑바닥을 관통해 흐르면서 꿈과 용기를 북돋았으리라. 대중가요는 특히 서민들과 애환을 같이하면서 때로는 희망이 되고 위안을 준다.

▲ 1994년 MBC TV에서 방영한 81부작 주말드라마 <서울의달>. 고속 성장을 이루던 1990년대 전후 서민들의 희망과 꿈, 좌절을 실감나게 그린 수작으로 손꼽힌다. 사진 속 인물은 <서울의달> 주연배우 한석규(왼쪽)와 최민식(오른쪽) 씨. 이들은 청운의 꿈을 품고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해 갖은 고생을 하며 성공을 꿈꾼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 끝은 달랐다. 출처=imbc.

그렇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다. 

쓸 苦, 다할 盡. 달 甘, 올 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기가 막힌 대구(對句)가 공감을 부른다. 고생고생하다 보면 낙은 기어이 찾아온다. 어렵고 힘 든 일이 지나면 반드시 우리 앞으로 즐겁고 좋은 일이 오고야 만다.

“결국 고생 끝에 성공했구려!” 이 한마디에 살맛나는 게 인생이란 것 아닌가.

역시 세상사란 돌고 도는 것.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하느니. 고통의 뒷자락을 밟고 달콤함이 기어이 찾아오지 않는가.
  
다만, ‘고진감래→흥진비래(興盡悲來)’처럼 흐렸다 개기도 하고 청명하던 날씨가 흐리고 비를 뿌리기도 하는 법. 너무 자만하거나 낙담하지 말 일이다. 흥망성쇠가 엇바뀔 수도 있은즉.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다. 어렵더라도 참고 견딜 일이요. 즐겁더라도 한없이 누리게 되리라 과신해선 안된다.
  
생멸하는 것 곧 순환하는 것이 정한 이치임을 깨달아 순리를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3년을 대처(大處)에서 산 적이 있다. 

지하철은 매일 사람들로 북적댄다. 한데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리고 왜 그리 바쁜 걸음들일까. 이리 흐르고 저리 뛰고. 역에서 내려 다시 환승역으로 내달리는 사람들의 잰걸음. 그들의 눈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앞사람의 뒤통수에 가 있다. 그들에겐 확보할 시야가 없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걸음도 고정돼 있었다. 도시 서민들은 매일 순간순간을 그렇게 뛰고 내달린다. 앞 사람들의 뒷모습만 쳐다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빛났고, 그들의 몸놀림을 역동적이었다. 믿음이 있어 그러리라. 지금 당장 힘들지만 이 계단을 밟고 지나 또 한 계단만 올라서면 뭔가 되리라는, 기어이 손에 잡히리라는 성취에 대하 기대감. 마이 홈, 마이카에 대한 꿈 그런 것 말이다.

“싯댕 경 거들락 피우지 말라게. 한 대 높직 한 대 낮직 헌댄 해여서. 되기도 허곡 안되기도 허는 거시 사름의 이력이라. 너미 허지 말라이.”
(있다고 거들먹거리지 마라. 한 대 높았다 한 대 낮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이력이지. 너무 하지 말라.) 

서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에 듣던 동네 어른의 말이 귓전에 살아난다. ‘물도 들었당 쌌당 헌다’

따지고 보면, 있고 없음이 그만 그만이요, 거기서 거기다. 좀 덜 가졌다고 낙망할 게 뭔가. 할 일도 많은 세상, 제 손으로 땀 흘리며 일구면 소유이고 성취이거늘.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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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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