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어르신이 방 입구 위에 걸린 액자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무 액자 속 빛 바랜 상장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찍은 단체사진도 눈길을 끌었다.
“예전에는 누구누구네 집에 일이 있다고 하면 서로 나서서 도왔지. 형제들 간에 우애가 좋고 마을 단체마다 단합도 잘됐어. 저기 상장을 봐봐. 각종 상을 휩쓸었던 적이 있었어. 우리도”
제주해군기지는 강정마을의 자연환경만 파괴시킨 것이 아니다. 조용하던 마을이 찬반으로 갈라지면서 이웃은 물론 가족과 형제간 관계마저도 풍비박산이 났다.
형제끼리 해군기지 찬반 논쟁을 벌이다 주먹질을 하고 제사까지 따로 지내는 일이 벌어졌다. 가족 구성원들이 다툼을 벌이면서 마을 자생단체와 공동체도 급격히 무너졌다.
각종 마을행사는 자취를 감추고 단합대회도 사라졌다. 반대측 주민들이 가까스로 행사를 마련해도 찬성측 주민들이 가지 않는 반쪽짜리 행사가 이어졌다.
“요즘 어르신들이 경로당에서 컵라면을 잡수지. 이젠 짜장면 하나 얻어먹기도 힘들어졌어. 경로당에 지원해줄 돈 자체가 없어. 벌금으로 다 써버렸는데 어쩔 도리가 있겠나”
해군기지 반대측 주민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지면서 지난 10년간 평화활동가를 포함해 연인원 70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물어야할 벌금만 4억원에 육박하고 있다.
사법처리 건수도 400여건에 달하면서 주민들은 졸지에 범법자 신세가 됐다. 급기야 벌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을회관 매각 방안까지 검토했지만 이마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초토화된 마을을 향해 박근혜 전 정부는 공사방해의 책임을 묻겠다며 강정마을 주민과 평화활동가 등을 상대로 34억원대 구상금 청구 소송까지 제기했다.
2005년 새만금방조제 반대 투쟁, 2008년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등 과거에도 공공갈등 사례가 적지 않았지만 정부가 국책사업 과정에서 마을주민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례는 없었다.
정부는 구상권 철회를 시작으로 지역 지원사업 재개와 민·군 복합항 기능 보강 등 후속절차를 계획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첫 특별사면에 강정주민들이 포함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마을 어르신들도 이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해묵은 갈등 해소를 위해 선 시간이 필요하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새 정부에서 강정마을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어. 그런데 해군의 진정한 사과와 노력 없이는 그 동안의 불신과 증오가 해소되기는 어려을 것이야”
“수십년 함께 지내온 형제들끼리도 앙금이 풀리지 않는데 이 노릇을 어찌하겠어. 서서히 봉합해 가야지. 정부가 진정성을 보여야 해. 우리 마음이 풀리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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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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