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교육청이 ‘검인정 역사교과서 4.3집필기준안’을 29일 확정, 교육부에 제출했다.

집필기준안 수립 용역을 맡은 ‘2020 희망의 역사 공동체’는 용역을 마무리해 최종 확정한 4.3집필기준안을 도교육청에 제출했다.

도교육청은 교육부를 비롯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교과서 집필진에 이를 전달하고, 검인정 역사교과서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교과서에 4.3 관련 내용이 적을 것으로 판단, 중·고등학교 교육과정 ‘학습요소’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중학교 교과서 4.3 관련 시안]

제주도의 1947년 3․1절 기념 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초등학생 등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제주도민들은 항의의 표시로 관공서까지 가담한 총파업을 일으켰다. 미군정은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를 제주도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아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여 명이 경찰과 우익단체의 탄압 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무장 봉기하였다. 미군정은 경찰력과 우익청년단체 증파에 이어 군대까지 동원하였으나 사태는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5․10 총선거에서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제주도의 유혈사태는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군대를 증파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후 강경한 진압 작전을 벌였다. 사건은 1954년 9월 한라산 출입을 허용함으로써 종결되었는데, 진압 과정에서 2만 5천 명 이상의 제주도민 이 희생되는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날개단> 제주 4․3 사건 희생자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제주도민 28만 명 중 2만 5천 내지 3만 명이 살상되었으며, 이중 86%가 국군․경찰․우익청년단체에 의해 살해 된 반면 14%는 무장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소주제 주요 학습요소
국민국가의 수립 국민국가 수립 운동, 3․1운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민족 독립 운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본주의와 사회 변화 개항, 식민지 경제, 국가 주도 경제 성장, 외환위기, 노동 문제, 대중문화 민주주의의 발달 동학 농민 운동, 독립 협회, 대한민국 임시 정부 헌법, 제헌 헌법, 4․19혁명,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지방 자치 평화 통일을 위한노력 제주4․3사건, 분단, 6․25 전쟁,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기본 합의서, 6․15 남북 공동 선언


[고등학교 교과서 4.3 관련 시안]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휴회한 이후 제주도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 대회가 열려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을 촉구하였다. 행사가 끝나고 가두 시위가 전개되는 중 경찰의 발포로 시위를 구경하던 도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제주도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제주지역 관공서를 비롯한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총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선언하고, 오히려 외지에서 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를 제주에 파견하여 2천 5백여 명을 체포 구금하고 고문하는 등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1948년 초 남한만의 단독 선거 실시를 둘러싸고 전국적인 반대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경찰은 제주도에서의 단독선거 반대 운동을 진압하면서 수백 명을 체포하였으며, 이중에 고문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극심한 탄압에 직면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350여 명의 무장대를 조직해 1948년 4월 3일 경찰 지서와 우익 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 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미군정은 경찰력과 우익 청년단을 증파하고 군대까지 동원하였으나 사태는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총선거가 실시된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남한과 북한에 적대적인 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국군, 경찰, 우익 청년단은 11월부터 약 4개월간 강경한 진압 작전을 펼쳐 민간인을 학살하고 제주도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을 불태웠다. 남로당의 무장대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살해하고 민가를 불태웠다. 6․25 전쟁기에 남아 있던 무장대가 진압되고 1954년 9월 한라산 출입이 허용됨으로써 제주4․3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 28만 명 중 2만 5천 내지 3만 명이 살해되었다.


평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모범 사례로서의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노력

제주4․3사건으로 인해 제주 지역의 많은 공동체가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인적 피해가 발생하였다. 1950년대 극단적인 반공체제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금지당했으며, 4․3사건 희생자와 그 유족들은 국가권력의 감시와 연좌제로 인하여 공직에 진출하지도 못하고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려 왔다. 1960년 4 19 혁명 이후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가 국회에서 받아들여졌으나 5 16 군사정변으로 좌절되고 오히려 탄압이 강화되었다.
1978년 현기영이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30년 이상 묻혀 있던 이 사건을 다시금 드러내 국민의 관심을 끌어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제주4․3사건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발표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대중 정권기인 1998년부터 진상을 조사하고 피해자․유가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어 2000년 1월 12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이 공포되었다.
2003년 10월 진상조사보고서가 작성되고 동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하여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정부는 4․3 평화 공원과 4․3 평화재단을 설립하여 추가 진상조사와 희생자 추모 사업 및 유가족 복지사업을 하고 있으며, 2014년 3월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제주도에서는 4․3사건 당시 진압에 나섰던 경찰 출신 단체인 경우회와 피해자 유족회가 화해를 선언하고, 일부 마을에서는 4․3기간 군경과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위령비를 한 자리에 모시는 사례도 나타났다. 이로써 제주도는 4․3사건의 진실 규명과 치유를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대립이 심했던 이념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와 인권 신장으로 나아가는 모범적 사례를 만들어 냈다.

용역진은 “교육부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작성 원칙을 충실히 수용해 중·고교 교과서 대주제마다 집필기준안을 제시했다. 교육과정 학습요소에 반드시 제주4.3이 포함돼야 한다”고 밝혔다.

용역진은 “중학교 교과서 시안은 4.3 발발 원인과 경과, 민간인 피해실태를 4.3진상보고서를 토대로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설명했다.

또 “고등학교 교과서 시안은 8단원 ‘냉전의 시작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10단원 ‘세계화와 민주주의 확대’에 4.3 내용이 담겼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제주도민 명예회복 과정을 서술하고,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 고양에 의미를 뒀다”고 덧붙였다.

도교육청은 “공청회에서 발표된 시안에는 고등학교 역사 교육과정 학습요소에 제주 4.3이 반영됐다. 중학교의 경우 전근대사 중심으로 기술돼 중학교 학습요소에도 4.3이 반영돼야 한다. 질필기준과 학습요소에 4.3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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