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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올레길이 10년을 맞았다. 방향 없이 빨리빨리 문화에 매몰되었던 우리사회에 제주올레길이 만들어낸 '걷기 문화'는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를 이끌어냈다. ⓒ제주의소리

2017년 정유년(丁酉年). 붉은 닭의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올 한해 도민들은 평안하게 지나가길 기원했지만 어김없이 한국사회와 제주사회엔 격랑이 일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그 중에는 희소식도 있었지만, 갈등과 대립, 논란과 좌절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다가오는 황금개띠 무술년(戊戌年)은 무사안녕의 해가 되길 기원하면서 <제주의소리>가 2017년 제주사회를 관통한 ‘7대 키워드’를 인물 중심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인물로 본 2017 키워드]⑥ (사)제주올레 10년, 걷는 문화 이끈 서명숙 이사장 

느림, 비움, 침묵…. 다시 사유, 채움, 철학…. 

걷기는 두 발로 성찰하기다. 느림과 사유, 비움과 채움, 침묵과 철학. 걷기의 진화를 표현하는 키워드들이다. 걷는다는 것은 ‘철학적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우리가 걷는 길은 ‘성찰의 공간’으로 읽힌다. 

수천 년간 서역을 연결해 동·서 간 문물이 왕래하던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가 그랬다. 중국 누강 협곡을 따라 티베트까지 가는 높고 험준한 절벽길인 ‘차마고도’ 역시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교역로이나 역시 사유의 길이다. 

역설적이지만 교역을 목적으로 수천 년을 이어온 그 길들은 예나 지금이나 최고(最高)의 순례 길이자 성찰의 길이다. ‘길’에는 뭔가가 있다. 굳이 그 뭔가를 꼽자면 철학일 게다. 

2007년 9월8일.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등학교에서 성산포 광치기 해변에 이르는 15km의 길이 열렸다. ‘제주올레’ 1코스다. 그렇게 개장한 제주올레가 2017년 출범 10주년을 맞았다. 

제주올레 1코스가 개장한 뒤 5년간 제주 섬 해안을 중심으로 21개 정규코스와 우도·가파도·추자도 등 제주 부속 섬과 중산간을 지나는 알파 코스 5개(1-1, 7-1, 10-1, 14-1, 18-1)를 포함한 총 26개 코스가 이어졌다. 꼬박 5년이 걸렸다. 전체 연장 길이는 제주의 해안선 둘레 253㎞를 훨씬 웃도는 425㎞다. 

다시 또 5년 세월이 지났다. 제주올레 10년 동안 대한민국엔 그야말로 ‘걷기 열풍’이 거세게 일었다. 10년을 꾸준히 ‘관통’해온 트렌드다. 자동차 중심의 관광에서 걷기 중심의 관광으로 전 국민적 걷기 열풍을 몰고 왔다. 제주올레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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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올레길 자료사진 ⓒ제주의소리

제주올레길 이후 전국에 조성된 걷기 여행길은 무려 500여개에 1600여 코스가 생겨났다. 총 길이만 무려 1만7000km에 육박한다. 제주올레가 일으킨 걷기 열풍은 전국 대도시와 지역을 가릴 것 없이 곳곳에서 비슷비슷한 ‘무슨 무슨 길’을 만들어내는 부작용도 낳았다.  

부산의 갈맷길, 지리산 둘레길, 통도사 무풍한송길, 월정사 전나무숲길 등등…. 대도시는 물론 전국 명산과 고찰 주변, 유려한 산, 관광지는 물론 굽이굽이 판자촌 밀집한 산비탈 도로와 한가로운 들판의 둑길에도 느림 예찬자들의 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올레가 일으킨 걷기 열풍의 결과다. 

제주도내에서도 올레길이 제주의 속살을 너무 드러냈다거나, 천천히 걸으며 사유하는 길이라는 취지와는 맞지 않게 되레 너무 빠른 속도로 길을 내온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주올레는 그동안 우리 스스로도 몰랐던 제주의 돌담, 돌집, 팽나무, 바닷가 돌멩이 하나 조차도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했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상징되는 난개발에 대한 경계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자동차로 관광시설을 쇼핑하듯 돌던 천편일률의 관광문화에서 사유하고 성찰하며 걷는 느림의 문화로 바꿨다. 

▷되도록 아스팔트길은 피한다 ▷사라진 옛길을 찾는다 ▷부득이하게 새 길을 낼 때는 친환경적 방식을 쓰고, 인공 설치물은 최대한 자제한다 ▷새 길의 폭은 1m를 넘지 않는다 ▷새 길을 내거나 보수할 때는 군·민 등 다양한 인력을 참여시킨다 ▷사유지는 올레가 소유하지 않되, 통과하도록 조율한다 등과 같은 6가지 올레길 조성원칙도 제주올레가 지향하는 바를 시사한다. 

제주올레는 그동안 관광 패러다임의 대변화를 이끌었다거나, 성수기 비수기 개념을 없애고 사계절 제주를 찾는 관광객 급증을 주도했다는 평가가 대세다. 또한 초창기 지역경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과 달리 실제로는 마을 음식점과 마을 민박, 대중교통 등 지역경제에 수천억 원의 이익을 가져다주었다는 공기관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순기능은 경제적 효과나 관광객 급증이 아니다. 무엇보다 걷는 행위를 통해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과 사유의 기회를 갖게 한 것이란 점이다. ‘빨리빨리’라는 속도전에 갇혀온 현대인들에게 ‘천천히’라는 느림의 에너지를 재발견하게 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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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은 올레길 개장 10주년을 맞은 가장 큰 보람으로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유와 성찰의 기회를 갖"이라고 말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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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숙 이사장과 함께 올레길을 낸 안은주 이사(사진 오른쪽). 안 이사는 서 이사장이 10년전 올레길을 낼 때 언론사 선배였던 서 이사장의 ‘게으름과 무능(?)’을 탓하며 직장을 휴직하고 그녀를 돕기 위해 제주행을 스스로 선택했다가 눌러 앉게된 미련한 여자다. ⓒ제주의소리

“올레길도 인생길도, 꼬닥꼬닥 걸으라게”라며 2007년부터 제주에 올레길을 내기 시작한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방향을 점검할 겨를도 없이 지나친 속도전에 매몰되어 왔다. 해방이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조건 ‘빨리빨리’ 문화를 당연하게 여겨왔다. 고도성장을 추구해온 결과다. 그러나 지나친 빠름은 방향을 잃기 십상이고 성찰과 사유라는 깊이 있는 경험을 배제하게 된다.” 

“올레길을 낸 가장 큰 보람은 여행의 패턴을 바꾸었다거나 관광객을 늘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됐다거나가 아니다. 올레길을 걷는 모든 이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 또는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기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비단 이런 현상은 올레길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의 ‘길’에서는 걷는 행위를 통해 이미 검증된 경험이다. 걷는다는 것은 곧 걸으면서 철학하게 하는, 그것을 통한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주올레’는 첫 출범 때부터 꼬닥꼬닥(느릿느릿) 걷는, 놀멍 쉬멍(놀며 쉬며) 걷는 길을 표방했다. 지난 10년간 올레길을 거쳐간 탐방객은 약 77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꼬닥꼬닥 놀멍 쉬멍 걸으멍’ 생각하게 하는 느림과 사유의 에너지가 770만명 가슴 속에서 마그마처럼 끓어오르고 있는 셈이다. 

지난 10년 동안 제주올레와 관련한 일부의 지적 중 ‘올레’라는 명칭 논란도 있다. 제주어의 ‘올레’는 집 대문 앞에서 큰 길까지의 골목길을 뜻하므로 지금의 올레길 명칭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본래 ‘올레’라는 제주어의 의미와, 제주도의 걷는 길을 상징하는 브랜드 네이밍(Brand naming)으로서의 ‘올레길’이 결코 다른 의미가 아니다. 

실크로드에 ‘실크’가 깔려 있지 않듯, 제주올레길에 집 앞 골목길 ‘올레’가 없다고 타박할 일은 아니다. 올레라는 살아있는 언어를 현대적 의미로 확장시켰고, 저 태평양이나 반도와 대륙으로 나아가는 더 큰 개념의 올레길을 개척한 셈이다. 

한때 제주로 오는 서울 김포공항 아침 풍경은 ‘골프백’을 맨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제는 트래킹 복장에 배낭을 맨 사람들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혼자든 둘이든 걷기 위해 떠나는 용기가 진짜 여행이다. 몸과 마음을 낮추게 하는 ‘미소 짓는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이상, 제주올레엔 100년 후에도 올레꾼들이 걷고 있을 것이란 서명숙 이사장의 예언(?)이 적중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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