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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예술의 비조(鼻祖) 김복진

2018년 01월 01일(월) 09:54
김준기 도립미술관장 news@jejusori.net

[BOOK世通, 제주 읽기] (78) 윤범모 『김복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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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범모 『김복진 연구』동국대학교 출판부. 2010.
필자는 매해 8월이면 미술사와 미술비평 영역의 선후배들과 충북 청원군 소재 팔봉산 중턱의 정관 김복진 묘를 찾아 참배한다. 그의 묘비에는 ‘정관 김복진 선생(1901-1940) 한국 최초의 근대조각가’ 라는 글귀가 있다. 참묘객들에게 김복진은 근대기 조소예술과 비평 및 진보적 예술운동의 선구자로 존경받는 정신적 스승이다. 특히 사회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필자에게 김복진은 ‘한국 사회예술의 비조’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몸소 실행한 행동가이다. 김복진은 '모험은 청춘이며, 청춘은 곧 생명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격정에 찬 자신의 삶을 대변한다. 

한국의 시민들에게 낯익은 시각예술가는 매우 드물다. 국민화가로 불리는 이중섭이나 박수근, 김환기, 이응노 등의 화가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등이 손에 꼽힌다. 조소예술가로는 누가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좀 막막해진다. 몇 안 되는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예술가들 중에 조소예술 분야는 더욱 드물다. 그만큼 조소는 회화에 비해 작가 숫자도 적고, 척박한 분야이기도 하다. 이렇듯 어려운 여건에서도 미술계와 사회에 뿌리를 내린 한국의 조소예술 분야는 100년 전의 선구자 정관 김복진(井觀 金復鎭, 1901-1940)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든든한 계열체를 형성하고 생장해왔다. 

이 책의 저자 윤범모는 20대부터 김복진 발굴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김복진 추모전시회 개최, 팔봉산 무덤 발굴과 묘비 건립, 김복진 전집 출판 등의 추모사업을 벌였다. 그는 김복진 작품과 생애 연구 전문가로서 정관교(井觀敎) 신자를 자처하며 수십년동안의 노력 끝에 ‘일제 강점 하 조소예술과 문예운동’이라는 부제를 단 연구서 “김복진 연구”를 펴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김복진은 고뇌하며 행동하는 식민지 청년예술가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 한국 근대미술의 토대를 쌓은 선구자로서 근대 최초의 조소예술가이자 미술비평가이며, 문예운동가로서 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지향하는 사회예술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전반기에 이르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이하 카프)’의 활동은 사회예술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있다. 카프는 박영희를 비롯하여, 김기진, 이활, 김영팔, 박용대, 이익상, 이적효, 이상화, 김온, 김복진, 안석주, 송영 등이 참가했던 예술단체로서, ‘일체의 전제세력(專制勢力)과 항쟁한다. 우리는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하고, 진보적 사회, 정치 운동으로서의 예술운동을 표명했다. 이른바 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논쟁이라는 이론투쟁을 했으며, 2회의 대대적 검거 사건 후 1935년에 해체했다. 카프의 예술운동은 비록 식민지 상황이라는 특수성과 한계로 인해 지속할 수 없었지만, 현실 속으로 뛰어드는 예술가들의 사회참여 노선은 행동주의예술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예술의 명확한 전범이다.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달성한다’는 카프강령을 기초한 김복진의 삶은 진보적인 예술운동과 사회운동, 정치운동 그 자체였다. ‘참다운 예술은 인간이 노동하는 것, 그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 김복진은 예술은 ‘노동이 고통이라고 느끼는 노예적 상태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술은 결코 예술을 위하는 예술이 아니고 민중을 위하는 예술이어야 한다’며, ‘예술지상성을 믿어 자위하며 이것으로 민중을 마취하는’ 예술을 적대시하였고, ‘지금까지 소시민의 비위에 적응한 순정(純正)미술,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예술에 있어서 정치적 성질을 거세하려는 과오’이며, ‘순정미술로부터 비판미술에로 약진’을 강조했다. 

1919년에 3.1운동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김복진은 1920년 동경 유학생 김복진은 1923년에 김기진과 이서구 등과 함께 신극 운동의 단체 ‘토월회(土月會)’를 결성하고 무대 장치를 맡는가 하면, ‘토월미술회(土月美術會)’를 꾸려 신미술을 가르쳤다. 1923년에 귀국하여 계급문학단체 파스큘라(PASKULA)에 참여했다. 이후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 경성여상, 경성공업, 서울기독교청년회 청년학과 미술과 등에서 가르치며 조각계 후진을 양성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면서 신미술계의 조각 영역을 개척하던 그는 카프(KAPF) 참여(1925년), 엠엘당(ML黨)에 가담했다. 1925년에는 조선프로예맹 창립을 주도했으며 이듬해 조선프로예맹 조직 중앙위원을 맡았다. 

1928년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기도당 위원에 선입됐고, 고려공청 중앙위원 겸 경기도책, 학생부 책임자를 맡았다가 그해 제4차 조공 검사사건으로 체포되어 실형을 살았다. 1934년까지 5년 6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했다. 이후 프롤레타리아예술론은 위축되었으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 점점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고민과 행동은 사그라졌다. 김복진과 카프예술가들의 꿈은 해방공간에서 잠시 등장했다가 다시 한국 예술계의 본류에 등장하기까지 50년간의 긴 잠에 빠져든다. 김복진과 그의 시대가 꾸었던 꿈은 그러나 완성형의 고정태가 아니라 미완의 유동태라는 점, 그의 시대와 다르면서도 같은 이 시대의 예술이 다시 고민할 대목이다. 

예술과 사회는 분리불가능한 동일체다. 예술이라는 장은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사회적 현실과 관계없이 별계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술은 사회적 장이 규정하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자 노력해왔다는 점에서 예술과 사회의 관계는 항상 긴장관계에 놓여있다. 20세기 한국의 예술 역사를 통틀어 예술과 사회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예술장 고유의 논리에 빠지지 않고 사회적 실천과 결합한 시기는 카프와 해방정국, 그리고 1980년대 민중미술의 시대 등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일제강점기의 진보적 지식인이자 예술가인 김복진과 그의 시대가 일군 놀라운 성취는 예술의 사회적 실천에 관한 논의가 한창인 동시대 예술에 커다란 시사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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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관장

현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과정 수료.
전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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