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0주년 신년칼럼] 김종민 (농부,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을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주4·3 희생자 유족들의 마음도 저와 비슷할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4·3유족들이 모두 민주당 지지자는 아니며, 지난 대선 때 문 대통령께 표를 주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많은 유족들이 문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는 까닭은 ‘민주정부’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겁니다.
 
제주4·3 희생자는 3만 명가량 됩니다. 이는 당시 제주 인구의 1/10에 해당합니다. 제주4·3의 비극은 엄청난 희생자 숫자에만 있지 않습니다. “총에 맞은 죽음은 고통의 시간이 짧으니 다행스런 경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마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물론 군부독재정권 시절에 제주4·3은 누구도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였습니다. 작가 현기영은 유신 말기인 1978년 제주4·3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소설집은 판매금지됐습니다. 이렇게 입을 틀어막은 결과, 국민 대다수는 제주4·3을 알지 못했습니다. 유족들은 수십 년 동안 억울하다는 호소 한 마디조차 못한 채 오히려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렸고 연좌제로 인해 장래가 막혔습니다.
 
■ 50여 년 맺힌 한을 풀어준 ‘민주정부’
 
제주4·3에 대해 말문이나마 틀 수 있었던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형성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입니다. 한 작가는 5·18민주화운동에 관해 쓴 소설에서 당시 외롭게 고립돼 있던 광주의 상황에 대해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열흘”이라고 했는데, 그 표현을 빌린다면 제주는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4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6월항쟁 이후 진상규명을 위한 언론과 시민사회단체의 많은 성과가 있었음에도 10여 년간 국가는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주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은 ‘민주정부’ 때였습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대통령은 공약하신대로 ‘4·3특별법’에 대해 2000년 1월 서명하여 제정·공포함으로써 4·3문제 해결의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오랜 기간 ‘빨갱이’, ‘용공분자’라는 험담을 들으며 고난을 겪었던 김대중 대통령께서 ‘공산폭동’이라고 매도당해 온 제주4·3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선 것은 정말이지 용기 있고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4·3특별법에 의거해 구성된 4·3중앙위원회에서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하자마자 불과 보름여 만인 10월 31일 제주도에 직접 오셔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공식 사과하셨습니다. 참으로 대통령다운 말씀이었습니다. 유족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에 50여 년 맺힌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이후 9년 여 동안 집권했던 두 정부는 제주4·3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았습니다. 두 정부에서는 4·3특별법과 4·3위원회를 폐지하려고 몇 차례나 시도했고, 이미 희생자로 결정된 분들 중 일부에 대해 그 결정을 취소시키려 했습니다. 극우세력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2009년부터 ‘진상조사보고서를 파기하고 희생자 결정을 취소하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심판, 행정소송, 국가소송을 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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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월 11일 김대중 대통령이 4.3유족대표와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초청한 가운데 청와대에서 4.3특별법에 직접 서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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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 도민과 4.3유족에게 사과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다행히 극우세력들의 소송은 모두 패소하긴 했으나, 만약 희생자 결정이 취소된다면 위패봉안소의 위패를 떼어내야 하고, 각명비에 새겨진 이름을 지워야 하며, 빈 무덤의 형태로나마 유족들을 위로해 주고 있는 행방불명인 표석을 없애야 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기에 유족들은 소송이 모두 끝날 때까지 수년 동안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학습효과로 인해 유족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민주정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 민주국가에서 ‘피해 배상’은 최소한의 정의 실현
 
한편 4·3유족들은 오랫동안 피해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유족들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지, 피해 배상은 그 후의 일이다.”라고 강조하며 배상 요구를 말려왔습니다. 
 
그런데 맨홀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아 지나던 사람이 그 안에 빠져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면 맨홀을 관리하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합니다. 이는 대법원 판례로 굳어진 사실입니다. 
 
하물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국민을 참혹하게 살해한 것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는 것은 더 이상의 군말이 필요 없는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4·3유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유족들의 처지와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제3자인 제가 유족들에게 “국가에 배상을 요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건 오만방자한 행동일 것입니다.
 
돈으로 희생된 가족을 살리거나 잃어버린 삶을 되찾을 수는 없지만, 희생자 및 유족들의 피해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는 것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소년·소녀들의 마음 속 상처 너무 커…‘트라우마 치유센터’ 건립해야
 
올해는 4·3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 갓난아기가 어느덧 일흔 살이 되었고, 열 살 난 어린이들이 여든 살 노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잃은 열 살 안팎의 어린 소년·소녀들은 군인과 경찰에 의해 깡그리 불타 폐허로 변해버린 마을을 고사리같이 여린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고, 이토록 아름답게 제주도를 복원시켰습니다. 이는 기적적인 일이며 존경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소년·소녀들의 마음 속 상처가 너무 깊었습니다. 1987년 신문사에 입사했던 저는 4·3발발 40주년인 1988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4·3에 대해 공부하며 약 7000명가량의 유족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40년’이라는 세월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려 40년이나 흘렀는데, 설마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괴로워할까? 이미 다 잊혀진 일이 아닐까?’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4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보지 못한 탓에 저지른 엄청난 착각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40년 전의 모든 일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저와 제 가족이 아팠거나 큰 모욕을 받았던 특별한 일들은 모든 장면과 소리까지 생생히 기억합니다. 유족들에게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은 제가 느꼈던 ‘아픔’과 ‘모욕’ 수준이 아닙니다. 
 
군·경 토벌대는 학살극을 자행하면서 어린 아이들을 맨 앞에 세워놓고 부모가 죽을 때 “만세!”를 외치게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유족들은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숨이 막혀 오는데 의사는 아무런 병이 없다고 하니 답답하다고 호소합니다. 가족들에게 총을 쏘고 집을 불태우던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을 차마 볼 수 없어 가까운 길을 놔두고 먼 길을 돌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시 8살 어린 나이였던 한 유족은 뒤뜰에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경찰들이 정문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을 보고 무서워 뒷문 뒤에 숨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경찰이 집에 불을 지르고 방안에 있던 할아버지(당시 54세), 아버지(28), 어머니(29), 첫째 동생(7), 둘째 동생(5)을 총으로 쏴 죽이는 모습을 겁에 질려 넋이 나간 채 숨죽이며 지켜보았습니다. 경찰이 돌아가자마자 불길 속에 뛰어들어 애기구덕 안에 있던 막내동생(1살)을 꺼냈으나 곧 굶어죽었습니다. 
 
그 ‘8살 소년’은 담담히 증언했는데,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남편의 입버릇은 ‘열다섯 살만 됐어도…’입니다. 남편은 ‘내가 열다섯 살만 됐어도, 그 정도의 힘만 있었더라면 시신을 마당으로 끌어내 불에 타는 것만은 막았을 텐데…’라는 말을 수시로 중얼거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피해자의 유족이 오히려 매일 입버릇처럼 스스로를 책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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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평화공원 비석 앞에서 눈물 짓는 유족.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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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희생자추념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제주도청. ⓒ제주의소리
대통령께서 유족들의 이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치유’를 뜻하는 ‘힐링(healing)’이라는 영어 단어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제목이 될 정도로 보편화되었고,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트라우마’(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생경한 단어가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치유’ 또는 ‘트라우마’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것입니다.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건립해 유족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수형인 유족들에게 가중된 고통 ‘전과자 낙인’
 
4·3 당시 군·경 토벌대에게 붙잡혀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많은 제주도민들이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제주도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 유족들은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육지의 어느 지역보다 묘소 관리를 중요시하는 게 제주도민의 일반적인 정서인데, 수형인 유족들은 조상의 무덤이 없는 탓에 음력 8월 초하루를 전후한 벌초의 시기에 느끼는 슬픔은 여느 때보다 더 클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일부 유족들은 무당을 통해 혼백을 모셔와 시신 없는 봉분, 즉 헛묘를 조성해 안타까움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유족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건 외부의 편견입니다. 4·3 때, 특히 1948년 11월경부터 자행된 초토화작전 때 군·경 토벌대가 무고한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참혹하게 학살한 사실은 그동안 많은 진상조사 과정을 통해 대부분 밝혀졌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극우 인사들조차 일부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형인’에 대해서는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형무소에 수감됐던 것 아니냐?”는 잘못된 시각이 있습니다. 
 
“처음엔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 상태였다가, ○○형무소에서 엽서를 보내와 비로소 수감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후 다시 소식이 끊겼다.”는 게 수형인 유족들의 일반적인 증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수형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언론을 통해 증언 내용을 소개할 뿐 수형인이 보내왔다는 엽서 외에는 이를 확인할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민주당 당 대표인 추미애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정부 때 ‘새정치국민회의’ 산하기구인 4·3특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던 중, 마침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수형인 명부》를 발굴해 1999년 9월 15일 공개했습니다. 이로써 수형인의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는데, 그동안 제가 많은 유족들의 증언을 듣고 신문에 소개했던 내용과 《수형인 명부》의 내용은 일치했습니다. 
 
《수형인 명부》가 공개됨으로써 수형인들이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됐던 사실이 밝혀지고, 같은 해 12월에는 재미동포 학자인 고(故) 이도영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발굴한 비밀문서를 통해 수형인들이 6·25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형인 유족 중에는 아직도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한번 새겨진 ‘전과자 낙인’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행태입니다. 극우세력들은 4·3특별법에 근거해 구성된 4·3위원회에서 적법한 절차를 거쳐 확정한 희생자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희생자 결정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는가 하면 4·3평화공원 앞에서 수형인을 비롯해 일부 희생자의 위패를 불태우는 소위 ‘위패 화형식’을 하는 등 패륜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마다 자신의 철학과 역사관에 따라 과거 사건에 대해 다른 평가를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희생자로 결정된 분들에게 대해 ‘폭도’ 운운하며 모욕하는 것은 범죄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혐오발언’은 법에 따라 처벌되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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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4월 19일 양근방(85) 할아버지 등 4.3 수형인 생존자들은 제주지방법원 민원실을 찾아 ‘4.3수형 희생자 불법 군사재판 재심청구서’를 직접 접수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4·3수형인, ‘불법 계엄령’과 ‘유령의 국방경비법’에 의해 희생
 
한편 《수형인명부》에는 ‘4·3군법회의’에 2530명의 명단이 기재돼 있습니다. ‘4·3군법회의’라 함은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등 두 차례에 걸쳐 마치 열렸던 것처럼 허위로 자료에 기재된 군법회의를 가리킵니다.
 
군·경 토벌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극을 자행하던 ‘초토화작전기’인 1948년 12월의 제1차 군법회의 때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여서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일제 형법 제77조 내란죄를 적용했습니다. 
 
제1차 군법회의의 근거가 된 ‘4·3계엄령’은 헌법의 규정과 달리 계엄법도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제헌헌법 제64조는 “대통령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3계엄령’이 선포될 당시 해당 법률인 ‘계엄법’은 제정되지 않은 상태였지요. 계엄법은 4·3계엄령이 선포됐던 1948년 11월 17일보다 무려 1년이나 지난 후인 1949년 11월 24일에야 비로소 제정됐습니다(법률 제69호). 따라서 ‘4·3계엄령’은 헌법을 위반한 위헌적이며 불법적인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불법 계엄령’에 관한 내용을 신문에 보도한 바 있는데,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씨가 ‘허위 보도로 양부인 이승만의 명예가 훼손당했다,’며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이 소송은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 판결로 종결됐습니다.
 
백보 양보하여 나중에 제정된 계엄법에 의한다 하더라도, 계엄법 어느 조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하고 잔인무도한 학살극으로 ‘4․3 계엄령’이 전개됐습니다. 제헌헌법 제46조는 ‘대통령은 그 직무수행에 관하여 헌법 또는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승만은 당시 국회의 탄핵을 모면했지만 역사의 탄핵을 받을 것입니다.
 
제2차 군법회의는 1949년 6~7월에 열린 것처럼 《수형인명부》에 기재돼 있는데, 이때 끌려간 사람들은 1948년 가을 계엄령이 선포돼 무차별 학살극이 벌어지자 살을 에는 듯이 추운 겨울 한라산으로 들어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1949년 3월경 “하산하면 죄를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소위 선무공작을 위한 삐라를 보고 내려온 피난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2차 군법회의 시기인 1949년 6월~7월은 계엄령이 해제된 때라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 없었지만 무리하게 국방경비법을 적용했습니다. 국방경비법은 기본적으로 군법(軍法)이므로 대개의 조문은 “군인 및 군속으로서~”로 시작되는데, 제32조(이적죄)와 제33조(간첩죄)만은 “여하한 자로서~”로 시작됩니다. 이를 근거로 군인 및 군속이 아님에도 민간인을 역시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제32조와 제33조를 적용해 군법회의에 회부한 것입니다.
 
학살극을 피해 은신했다가 하산한 피난민들을 느닷없이 ‘이적죄’와 ‘간첩죄’ 혐의를 씌워 군법회의에 회부한 것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방경비법 자체가 제정 주체도 모호하고 법률 호수도 없는 유령법이라는 점입니다. 
 
일부 법령집에는 국방경비법이 ‘법률호수미상(法律號數未詳)’으로서, 1948년 7월 5일 ‘공포’됐고, 같은 해 8월 4일부터 ‘효력 발생’했다고 슬그머니 끼워놓았습니다. 그리고 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국방경비법을 제정한 것처럼 표기했습니다. 
 
그러나 1946년 12월 12일 개원식을 가진 미군정기 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5월 6일 제1호 법률(Public Act)을 제정한 것을 시작으로 1948년 5월 19일 제12호 법률을 제정한 후 이튿날인 1948년 5월 20일 해산되었는데, 조선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12개의 법률은 국방경비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국방경비법은 실체가 없는 유령법이고, 유령법이기에 법률 호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 서종철·김정무·전부일 등 제주 주둔군 간부들조차 “군법회의 없었다” 증언
 
설령 계엄령이 합법적으로 선포된 것이고, 국방경비법이 실제로 제정·공포된 법률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당시 군법회의는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은 허구의 재판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수형인들이나 심지어 수형인들을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호송했던 경찰 출신들조차 “형무소에 도착하니 간수나 형무소장이 형량을 알려주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했습니다. 
 
군법회의가 열리지 않았다는 증언은 피해자들의 일방적 주장이 아닙니다. 제1차 군법회의가 열렸다는 1948년 12월 제주 주둔 제9연대 부연대장이었던 서종철(국방부장관·한국야구위원회 총재 역임)은 “군법회의를 열었던 기억이 없다.”라고 증언했고, 제9연대 군수참모였던 김정무(준장 예편, 육사2기 동기회장 역임)도 “군법회의에 대해 모른다.”고 4·3위원회에 증언했습니다. 증언 내용은 모두 캠코더로 녹화했습니다. 제2차 군법회의 당시 제주 주둔 제2연대 1대대장이었던 전부일도 “군법회의에 대해 모른다”고 증언했습니다. 
 
무려 2530명이 군법회의를 받았다고 하는데, 주둔군 간부들조차 부인하고 있는 건 군법회의가 허구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 문재인 대통령께 바랍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올해 열리는 제70주기 4·3위령제에 꼭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위령제에 참석한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 유일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위령제에 참석하셔서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비록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더라도 대통령이 비극적인 과거사에 대해 국가를 대표해 사과하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며, 이는 선진국 등 문명국가에서 흔한 일입니다. ‘추도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유족들에게 사과하시고, 특히 ‘수형인의 억울한 희생’에 대해 꼭 언급해 주셔서 수형인 유족들의 한을 풀어주시길 바랍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께서 사과하신 것은 뜬금없는 게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을 명확히 밝혀놓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사과하신 것입니다.
 
수형인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드린 이야기는 새삼스런 게 아닙니다. 2003년 확정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미 “4‧3사건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재판으로 볼 수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한편 국회는 “4·3특별법 제정 이후 진상규명의 성과를 반영하고 명예회복 조치를 내실화”하기 위해 4·3특별법을 개정하였는데(법률 제8264호, 2007. 1. 24), 개정 법률에 따르면 희생자에 대한 정의(제2조 제2호)가 그동안은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자’ 등 세 종류였으나, 여기에 ‘수형자’를 추가시켰습니다. 수형자가 정당한 재판 절차도 없이 불법 감금됐던 것이라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을 국회도 인정해 ‘수형 사실’ 그 자체를 희생으로 본 것입니다.
 
또한 극우세력들이 수형인 등에 대한 희생자 결정을 취소시키기 위해 헌법재판소와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이처럼 4·3특별법의 의거해 국가의 공식 보고서로 확정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수형인을 희생자로 포함시킨 △국회의 4·3특별법 개정, 그리고 극우세력들의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사법부의 판결 등 4·3수형인에 대한 실체는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그림=고길천 화백.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제 남은 건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뿐입니다. 비록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해 발표하긴 했으나, 만일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없었더라면 진상조사보고서는 빛이 많이 바랬을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가 50여 년간 유족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었듯이, 수형인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는 70년간 웅크린 유족들의 가슴과 어깨를 활짝 펴게 할 것입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힘써주시길 기원합니다. 
 
제주도 농부 김종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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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4월 18일 당시 대통령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참배 후 방명록에 남긴 글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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