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54) 씨에 씨 나고, 고목나무에 회초리 난다

* 나곡 : 나고
* 덩걸낭 : 고목나무(古木)
* 훼초리 : 회초리

종자를 뿌리면 콩에 콩, 팥에 팥으로 그 씨앗과 같은 종자가 다시 나온다. 나무 또한 오랜 세월이 흐르면 늙어 고목이 되지만, 둥치에서는 장차 재목감이 될 회초리가 나서 자라게 된다.

타고난 재능과 바탕은 그대로 전수돼 다음으로 대(代)를 잇게 된다 함이다. 한마디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속담이 있다.

‘쿠지에 쿠지 나곡, 덩걸에 훼초리 난다.’
(쿠지에 쿠지 나고, 둥치에 초리 난다.)

‘쿠지’란 가시가 달린 나무나 그 가지를 일컫는다.
  
나무는 어떤 것이거나 그 나름의 둥치를 가지고 있다. 가시나무에는 가시가 돋힌 나무가 싹이 터서 자라나는 것과 같이, 고목 둥치에서는 회초리감이 돋아나서 자라는 것이 본연의 이치다. 돌연변이가 아닌 바에, 본래의 바탕에 어긋난 엉뚱한 것이 생겨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만큼 유전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걸 기막히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백두 혈통’이 아닌가 싶다.

북한에서는 백두산을 매우 신성시하는데, 이는 김일성의 만주항일 유격대 활동과 관련시킨 것이다. 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김일성과 교묘히 연계시켜 그를 우상화하고, 그의 후손들을 ‘백두혈통’ 운운하면서 초월적인 존재로 미화하고 과장해 온다. 그들의 우상화 작업이다.

따라서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탄생했다 같은 주장을 하면서 김일성의 혈족들을 백두산과 연관 짓게 된 데서 ‘백두혈통’이란 조어가 생겨난 것이다.

이를 북한식으로 해석하자면, ‘민족의 성산(聖山)인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항일빨치산운동을 했던 김일성의 위대한 혈통’ 정도의 뜻이 된다.

김일성 가문은 1945년 이후, 한반도 북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면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면서 3대째 권력을 세습하고 있다. 그야말로 전근대적 왕정에서나 통하는 것이라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어느 나라, 어떤 권력체계에도 이런 경우는 없다.

▲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면서 3대째 권력을 세습하고 있다. 그야말로 전근대적 왕정에서나 통하는 것이라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어느 나라, 어떤 권력체계에도 이런 경우는 없다. 사진=오마이뉴스.

애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일성과 그의 부인 김정숙이 백두산 인근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며 ‘백두혈통’이라 불렀다.
  
굳이 백두혈통의 맥을 따진다면, 암살된 김정남은 김정일의 적장자(嫡長子)로 볼 수 있되, 김정은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첩의 아들, 서자(庶子)로 봐야 옳다.

그곳의 적서(嫡庶)는, 김정일이 자신의 경쟁자였던 이복동생 김평일을 밀어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인데, 결국에는 자기 후손에게는 자충수로 작용해 김정은이 혈극(血劇)을 벌이는 단초가 되고 있다.

도대체 백두혈통이란 게 말이나 되는가. 소도 웃을 일이다.

“王侯將相寧有種乎”(왕후장상 영유종호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라 했다. 
중국의 진나라 진승이 한 말이다.

진시황이 죽고 그 아들 호해가 왕위에 오르나 진나라는 조고의 손아귀에 들어가 나가라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그 무렵, 진승이 오관과 함께 강제 노역에 차출된 고향 사람들을 인솔하는 책임을 맡아 가는 도중 큰비를 만나 기한 내 도착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이왕 문책돼 죽을 것이면 세상을 뒤집자 제안한다. 

그때, 그가 군중을 향해,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단 말인가? 우리 같은 농민도 왕이 되지 말란 법이 있나? 이 썩어 빠진 세상을 한번 뒤집에 봅시다.”고 외쳤다.
 
진승은 내분으로 죽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높이 쳐들었던 깃발은 결국 유방(劉邦)에 의해 빛을 보게 되면서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 건국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도 왕후장상의 씨앗이 아닌, 하층계급 출신이다.  

“씨에 씨 나곡, 덩걸낭에 훼초리 난다.”

어릴 적에 많이 들으면서도 어려워 해득이 안돼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었다. 나이 먹으면서 이 말이 풍기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알아차렸다. 올바르지 못한 사람의 악행(惡行)을 비난할 때, 특히 한 집안 형제가 부모를 닮아 안 좋은 일을 저지를 때면 으레 “씨에 씨 나곡~”이라며 욕을 퍼붓는 게 아닌가.

옛날 진나라 진승이 살아 있다면 북한 김정은을 향해 한소리 할 것이다. “왕후장상이 따로 있겠느냐?”고. 그런 연후, “씨에 씨 나곡, 덩걸랑에 훼초리 난다” 했을 테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손자랍시고 옷이며 행동거지까지 제 할아버지 시늉을 하는 걸 보면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그 덩치에 코스프레도 분수가 있지.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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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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