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아름다운 것만 예술이 아니다. 우울하고 처절한 서글픔은 깊은 성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재일제주인 故 송영옥 화백의 상당수 작품에는 짙은 어두움이 느껴진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평생을 방황하듯 살아온 경계인의 색이 묻어났기 때문일까. 송영옥 탄생 100주년인 올해, 그의 고향인 제주에선 자이니치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그의 분노·절규를 기억하기 위해 제주도립미술관에서 2월 25일까지 그의 특별전을 마련했다. 버거운 역사의 무게를 온 몸으로 견뎌온 송영옥의 일생과 예술세계. 누구보다 거기에 천착해온 김복기 경기대 교수(아트인컬쳐 대표)를 통해 지난 100년간의 송영옥을 만나보자. <제주의소리>는 송 화백을 조명한 김복기 교수의 글을 두 번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설 특집-디아스포라, 재일제주인 故 송영옥] (下) 절박했던 개인의 삶, 고독한 화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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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옥의 작품 <개(Dog)>, 1987,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4. 마이너리티의 ‘쓰디쓴 빛’

송영옥의 작품은 1970년대 말부터 또 한 차례의 변화를 겪는다. 1977년 당뇨병으로 10년간을 병상에서 지내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개> 시리즈로 이행한 것이다. 이전 시기 그의 작품은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많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에 탐닉하다보니 마티에르나 색채가 회삽(晦澁)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일단 <개> 시리즈는 표현성이 강하면서도 동물이라는 메타포를 동원해 주제를 살짝 비틀고 있다. 그 변화로 작품은 생명감, 약동감, 해방감 같은 화면의 리듬이 더 탄탄하게 구축되고 있다. 일본의 평단에서도 역시 이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까지 <원폭 돔>이나 <독재자> 등의 작품에서 자주 그의 고발 자세에 접해 왔는데, 관념성이 다소 강해 화면이 약간 무거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들개>에 있어서는 다가오는 기백이 굉장하다. 기백이 담긴 역작이다. … 중후함과 기묘함, 이 두 가지가 때에 따라서는 그의 작품 속에 대류처럼 표현되어 왔다.”_16)

노년기에 접어든 송영옥의 작품은 개와 함께 전개됐다. 싸우는 개, 미친 개, 무리를 지은 개 등으로 고독, 내적 갈등의 심리세계, 인간사와 정치 체계의 아귀다툼 등을 담아냈던 것이다. 개를 통해 자신의 ‘소서사’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 분단, 통일 등 ‘대서사’까지를 응축해낸 것이다. 그런데, 송영옥이 그려내는 개는 언제는 ‘온전’하지가 않다. 절름발이거나 아예 한쪽 다리가 없는 불구의 몸이다. 그리하여 정면을 향해 두 눈을 부라린 개의 표정은 대단히 불안하고 야만적이다. 때로는 <고독한 왕자>라는 작품처럼 이 땅에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처지다. 이 개성적인 송영옥의 <개>를 해석하는 일본 비평가의 눈이 실로 날카롭다. 

“불필요한 설명을 떼어내 개로 변환시켜, 암울한 역사 체험이 묵시되어 있었다. 어디까지나 영원한 ‘임의(任意)’라고밖에는 말 못할 한 마리의 개가 지표에 머리를 추켜들고 크게 가로누워, 그 임의의 실존이 깊은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띠우며 온몸으로 노려보고 있다. 견실한 밀도를 가지면서 내적으로 통괄된 자유분방함이 깃든 한 화면이 보는 자가 딛고선 근저의 위태로움을 투시하며 응시하는 것 같은, 기이한 긴박과 심정(沈靜). 어떤 혼의 광원이 거기에 보였던 것이다. … 억제된 표면을 관통하는 낮은 목소리, 혼의 ‘쓰디쓴 빛’이라고도 할 확실히 희귀한 방출이 있었다. 투명한 이화(異化)의 조용한 방출이라 하겠다. … ‘쓰디쓴 빛’의 유래와 행방은 여러 가지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깊이 그리고 수없이 절감하며 뼛속에까지 고통을 새기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자부(自負)의 핵심으로 승화시킨다. 무언의 사상, 그 생성의 장소이기도 한, ‘쓰디쓴 빛’과 ‘빛의 쓰디씀’ 사이에 숨겨진 왕복이 표현과 현실에 걸친 한 인간사의 실체를 이루는 편력은 실로 고독한 것이다.”_17)

송영옥에게 전후의 혼란은 아주 길고 아주 고독했다. 조국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혹한 시대를 거치면서 태어난 송영옥의 작품은 단순히 고발적인 작품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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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옥의 작품 <고독의왕자(Prince, Looking Lonely)>, 1984,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투견, Struggle Fighting dog, 1987,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jpg
▲ 송영옥의 작품 <투견(Struggle Fighting dog)>, 1987,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자신의 체험이 고발이라는 형태로 밖을 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의 슬픔도 화면에 배어나오게 하는 것이다. 고발만의 작품이 마른 스폰지라 한다면, 송영옥의 스폰지는 닿으면 슬픔으로 이쪽의 손까지 젖는 것이다.”_18)

송영옥이 이국에서의 ‘쓰라린 어둠’을 뚫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은 건 1983년 9월의 일이다._19) 실로 55년만의 감격어린 귀국이었다. 그는 조총련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그렇게 멀고멀었던 고국을 불과 2시간만의 비행으로 찾은 것이었다. 

송영옥은 그 이후 탈이나 불상, 농악놀이나 정물을 그린 보다 ‘온건한’ 작품을 발표했다. 자신의 피, 그 문화의 뿌리를 찾아 백제와 신라의 자랑스러운 유산을 작품의 자양분으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이 부류의 작품은 이전보다 훨씬 더 밝게 가볍게 조용하게 춤추며 호흡한다. “어줍지 않은 그림으로 평생을 싸우다 보니 청춘은 다가버리고. 이젠 지쳤어.”_20) 그래서일까. 송영옥의 노년기 작품은 가해자를 향하는 저주의 시선이나 피해자로 향하는 절망의 심경보다는 좀더 따뜻한 여유가 보이기 시작한다.(도쿄와 서울에서 만났던 송영옥은 대단히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제는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조국, 그리고 애타는 향수를 마음껏 의탁할 수 있는 고향 제주를 다시 찾았기 때문일까. 모국주의(vernacularism)야말로 인간 본능의 회귀일진대, 상처를 입은 인간의 본능은 더 더욱 절박하리라. 

5. 미술사적 평가

송영옥의 예술을 지나치게 자이니치라는 작품의 환경, 발언(내용)에만 치중해서 평가하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 내용이 자신의 삶과 상당히 겹쳐 있고, 그 발언 또한 충분히 매력적인 비평의 대상이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송영옥 작품의 형식적 측면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선, 송영옥의 작품에 나타나는 형식상의 특징은 어떤 대상(주로 인간이나 개)을 뚜렷이 부각시키면서, 그 배경은 대체로 구체적인 설명 없이 단색조로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배경은 마땅히 주제의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한 조형적 장치임에 틀림없다. 우선 그 배경을 아주 현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이국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부딪쳐왔던 좌절의 벽이거나, 그 처절한 현실을 뛰어넘어야 할 도전의 벽 혹은 극복의 벽으로 보인다. 벽은 그 아픔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 송영옥의 배경을 상상의 세계로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평화롭기만 했던 제주의 푸른 바다 혹은 그것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고향 하늘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바다와 하늘은 희망(혹은 아르카디아)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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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옥의 작품 <십자가(A Cross)>, 1978,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여기에서 더 나아가 송영옥 작품의 미술사적 계보나 양식적 특성을 심도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 활동의 터전이었던 일본미술을 겨냥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일본화단에서의 송영옥의 활동은 오랜 화력에 비해 매우 단조롭다. 그의 본격적인 활동 거점은 1957년부터 출품했던 자유미술협회전이었다.(그는 생전에 다섯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것이 그의 길고 긴 화력(畫力)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미술가협회의 연혁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제1기-전전, 1937년 자유미술가협회가 창설되어 소시민적 자유주의와 참신한 모더니즘으로 주목을 받았다. 무소불이의 권력으로 군림했던 관전(官展) 문부성미술전람회에 비교하면 재야적 성격이 강했지만, 보수에 도전하는 새로운 기운이 팽배했던 시기다. 이중섭, 유영국 같은 조선인 유학생 출신들이 여기에서 활동했다.

② 제2기-1947년에 처음으로 도쿄도미술관에서 전람회를 개최했다. 패전 후의 혼돈스러운 상황을 예리하게 반영했던 작품이 많이 출품되어 새로운 휴머니즘의 미술단체의 성격을 추진시켰다.

③ 제3기-1950년부터 1963년까지 해마다 많은 신인을 영입해 작품은 다양한 내용을 지니고, ‘자유미술형’의 갱신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늘 유행에 영합하지 않고 개인의 주체성과 민족성이 주장되었다.

④ 제4기-1964년. 수십 명의 회원이 탈퇴했지만, 새로운 자유미술협회로서 발족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영옥의 작품 이력은 자유미술가협회의 제3기부터 제4기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된다. 제3기의 일본 전후미술은 특히 구상미술에서 ‘밀실의 회화’나 르포르타주(reportage) 회화로 대표되는 양식이 풍미했다. 앙데팡당전이나 자유미술전도 크게 르포르타주 회화의 양식적 계보를 잇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르포르타주 회화는 1950년대 초반에 서민의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사회적 사건을 ‘사실(事實)’로 그려냄으로서 그것을 ‘보고(報告)’하고 ‘기록’하기 위한 일련의 그림이다. 문학에서 말하는 르포르타주(기록문화)를 회화에 적용시켜 기존의 자연주의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새로운 리얼리즘을 목표로 했다. 르포르타주 그림이 태어난 배경에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 격화, 한국전쟁으로 후방기지가 된 일본 등 1950년대의 정치 사회를 둘러싼 긴박한 상황이 있었다._21) 

그러나 자유미술가협회는 제4기로 갈수록 제1기의 첨예한 시대성이나 제2기의 사회적 발언은 점차 사라지고, 특히 일본미술이 국제적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도정에서 마침내 ‘올드 패션’으로 뒤처지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송영옥은 일본 현대미술의 주류에서 활동을 했거나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내용, 그 증언과 고발이 너무 메아리 없는 작은 외침으로 그친 것은 아닐까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송영옥의 발언이 혼자만의 독백이나 일기 형식에 그쳤다 하더라도, 그가 이 세상에 자신의 삶과 존재를 얘기할 수 있는 표현 언어는 오로지 ‘미술’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송영옥 자신의 온전한 삶이 배어있는 있는 미술작품으로 말이다. 그는 조형적으로 동시대성을 따르거나 앞서지는 못했다. 송영옥의 입장에서 보면, 그 동시대성보다는 자신이 처했던 시대의 삶이 더 가열하고 절박했는지 모른다. 설사 그가 일본미술사에서 국외자로 밀려난 신세였다 하더라도, 결국 한국의 미술사에서는 그 존재를 정당하게 평가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지금 송영옥의 작품, 과거 불행했던 시대를 살았던 디아스포라의 슬픈 역사, 그 기억의 유산을 이렇게 소중히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자이니치가 그려낸 민족사! 그 디아스포라의 미술이 역사의 필연으로 오롯이 피어오른다. 화가 송영옥의 예술은 살아있다. 

슬픈자화상, A Sad Self-Portrait, 1973,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jpg
▲ 송영옥의 작품 <슬픈자화상(A Sad Self-Portrait)>, 1973,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각주

16) 시부타니 에이지, 앞의 글.

17) 오리타 타츠오(織田達郞), 「송영옥-쓰디쓴 빛, 빛의 쓰디씀」, 1985. 이 글은 광주시립 하정웅미술관의 하정웅명예관장이 송영옥의 생전에 필자에게 청탁해 받아놓은 글로,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이 글은 1990년에 하정웅 씨가 제공해 주었다.  

18) 치바 시게오(千葉成夫), 「하정웅컬렉션과 광주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도록 1999』, 1999, p.16. 

19) 1983년 9월 14일 서울에 도착해, 여의도 광장의 이산가족찾기운동 현장을 찾았다. 다음날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경주로 이동해 고적답사를 하는 등 3박 4일의 관광을 끝내고, 9월 17일 부산에서 고향 제주로 건너갔다. 고향에서는 작고한 두 형 외에 형과 동생 등 가족을 만났으며, 10월 11일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돌아갔다.(송영옥, 앞의 글)

20) 김복기, 앞의 글.

21) 후쿠즈미 렌(福住廉), 『현대미술용어사전 ver.2.0-Artscape』
https://goo.gl/NnMj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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