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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침묵, 그러나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거대한 물결 'Me Too'

2018년 03월 05일(월) 09:00
서영표 교수 news@jejusori.net
[BOOK世通, 제주 읽기] (83) 리베카 솔닛,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김명남 역,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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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베카 솔닛,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김명남 역, 창비, 2017. 사진=교보문고 홈페이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종 여성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대한 폭력이다. 그것은 여성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 목소리의 의미를, 즉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참가하고, 동의하거나 반대하고, 살며 참여하고, 해석하고 이야기할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때려서 침묵시키고, 강간을 저지르는 데이트 상대나 지인은 피해자의 ‘싫다’는 말이 자기 몸에 대한 권한은 자신에게만 있다는 뜻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의 강간문화는 여자의 증언에는 가치도 신뢰성도 없다고 선언하며,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마저 침묵시키려고 하며, 살인자는 여자를 영원히 침묵시킨다.” -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38쪽) 

리베카 솔닛의 주된 관심은 ‘침묵’에 있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특징을 여성에게 강요된 침묵을 통해 풀어낸다. 인종차별, 경찰의 무자비함, 가정폭력의 충격은 직접 겪어서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 충격과 고통을 말하는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고 모욕하는 문화 속에서는 피해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고 그 침묵 위에 고통은 묻혀 버린다. 

“침묵은 어디에나 작용하는 힘이고, 서로 다른 범주의 사람들에게 고르지 않게 분포되어 있다. 기성 체제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그 침묵들에 의존하여 존속한다.” - (54-55쪽)

솔닛의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보려 한다. 필자는 아주 평범한 한국 남자다. 어릴 적 유독 가족에게 권위주의적인 동네 아저씨들을 보고 배우면서 그게 왜 문제인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인 없는 아이였다. 10대 후반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권위주의적 태도에 도전했지만 내 스스로가 어머니에게 또 다른 ‘권력’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밑도 끝도 없는 훈계를 늘어놓고 ‘남자의 길’을 가르치려 들던 남자 어른들을 ‘증오했지만’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여동생에게는 아버지만큼 가부장적으로 대했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공격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았지만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하곤 했다.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어린 소년의 눈에도 여성의 지위는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이 체험적으로 느껴졌던 것일 게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어린 시절 필자가 느꼈던 우월감은 근원은 아주 원초적인 것이었다. 남성이 여성보다 육체적인 힘이 강하다는 것.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철지난(불행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만) 주장은 힘의 논리로 상대를 억압하고 온갖 기회를 독식한 후에 그 결과로 주어진 성공을 지적인 우월함으로 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많은 남자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쌓아 올린 지적인 우월함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오로지 힘에만 의존하는 매일 매일의 폭력으로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대단히 지적으로 세련되어 보이지만 ‘남성성’이 공격적이라고 주장하는 진화심리학의 주장의 근저에는, 힘의 논리를 숭상하는 ‘원시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권력이라고 표현된 힘, 부로 상징되는 권력이 지배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현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앞에서 ‘원시적’이라고 표현했던 신체적 힘의 논리가 지배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의 논리는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을 남성의 것에 맞추어 놓는다. 만연한 성추행과 성희롱이 사회적 쟁점이 될 때 많은 남자들은 ‘유별난’ 여자들의 민감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드물다. 하지만 남자들의 생각은 ‘이제는 정말 조심 해야겠어’라는 사뭇 냉소적인 반응에서 드러난다. 앞으로는 정말 ‘조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별 것도 아닌 것으로 귀찮게 한다’는 에두른 표현이다. 그들에게 “법적 권리와 목소리를 갖춘 동등한 인간과 타협을 통해 성적·사회적 상호작용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이 불만”(144쪽)인 듯 보인다. 성폭행 사건이 벌어지면 피해자는 돌이키고 싶지도 않은 당시의 상황을 꼬치꼬치 캐묻고 2차 피해에 노출시키는 일은 특별하지도 않다. 경찰과 검사가 대부분 남성일 뿐만 아니라 법률체계 자체가 남성의 시선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법률적 심판대상이 된 성폭행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에 있다. 성폭행을 저지른 남자는 당당하지만 피해자는 수치심을 느낀다. 

“(여성이) 말한 내용이 아니라 (그녀가)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괴롭힘을 끌어들인다.” - (90쪽) 
 
왜냐면 여전히 남성의 시선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배의 근저에는 다양한 ‘전문적’ 담론이 자리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려고 하는 남성의 공격적인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런 본성은 수렵과 채취 시대의 원시시대에 형성된 것이지만 말이다. 생물학적 환원론이라고 불리는 ‘고상한’ 담론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일상의 상식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경우 피해 여성들의 야한 옷과 화장을 탓한다. 여기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우겨왔던 남성의 지적 우월함은 완전히 사라진다. 도대체 문명은 무엇이고 교육은 무엇인가? 단지 ‘검둥이’가 싫다는 이유로 흑인에게 총격을 가하는 백인 인종주의자가 ‘검은 피부’가 혐오스러웠다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남성들이 모욕하고 짓밟는 여성은 우리의 어머니이고 누이들이다. 그렇다면 성폭행을 저지르는 남자들은 백인 인종주의자보다 더 ‘악질적’이다. 인종주의에 찌든 백인극우파에게 ‘유색’인종은 그 어떤 공통점도 없는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그렇지 않다. 혐오와 증오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한쪽은 혐오범죄로 인정받고 있지만 다른 한쪽은 그냥 일상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일로 치부하고 만다는 것을 문제 삼고 싶을 뿐이다. 아니면 정신 이상자의 일탈적 행위로 협소화된다.(강남역 살인 사건을 떠올려 보면 된다.) 그리고 우리사회는 “피해자의 장래보다 강간범의 장래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전자보다 후자를 더 믿어준다.”(65쪽)

모욕적인 성희롱 발언을 일삼으면서 남자들이 흔히 내놓는 변명은 ‘농담이었다’는 것이다. 솔닛의 표현대로 하자면 정말 농담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것은 남자(솔닛의 경우는 백인 남자)들이다. 남자들은 “자신과 자신들의 세상을 나쁘게 비추는 농담은 받아들일 줄 모르고, 그때 그들이 화내거나 위협하는 모습을 보자면 그들은 사사건건 제 뜻대로만 하고 싶어 하고 자기가 멋지다는 소리만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지 않은가?(244쪽) 매일 매일 신문과 텔레비전을 장식하는 정치권 뉴스를 들여다보면 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관공서와 회사의 사무실, 심지어는 대학 강의실에서까지 매일 겪는 일임이 분명하다. 

이야기를 방향을 바꾸어 보자. 가해자로서의 남성이 아니라 ‘피해자’로서의 남성이라는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로. 물론 남성을 피해자로 보는 것은 “여성의 육체와 섹스하는 것은 이성애자 남자에게 주어진 권리”라고 믿으며 여자들은 그런 권리에 “끼어들려고 하는 짜증스럽고 불합리한 문지기”로 생각하는, 그래서 “여자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가해자로서의 남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251쪽) 이러한 태도를 ‘남성적’이라고 추켜세우는 문화에서 남자들은 ‘온전한 감정’을 잃게 된다는 의미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것이다. 아래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남성성이란 거대한 포기다. 분홍색을 포기하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성공적으로 남성화한 남자아이들과 남자들은 일상에서 감정, 표현력, 감수성, 그 밖의 온갖 가능성을 포기한다. 남성화한 영역―스포츠, 군대, 경찰, 모든 인력이 남자인 건설현장이나 자원 채취현장―살아가는 남자들은 그곳에 소속되기 위해서 그보다 더 많은 것들까지 포기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폭넓은 감정의 가능성을 간직할 수 있지만, 일부 격렬한 감정, 숙녀답지 않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감정, 그 밖의 많은 것들―가령 야망, 비판적 지성, 독자적 분석, 반대, 분노를―표현하는 행위는 장려되지 않거나 손가락질 당한다.” - (54쪽)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본다. 열 살 언저리의 어린 소년은, 지금은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만화영화의 슬픈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부정해야 했다.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컸던지 그 부정의 감정은 꽤 오랫동안 강박으로 작용했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에 남아 있다. 만화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따위의 행위는 ‘여자애 같은 것’이라는 생각했을 것이다. 슬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일상에게 부정당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신체적으로 취약하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존재다. 그런데 남자아이로 길러지는 것은 취약함고 불안정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약함과 불안정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혐오함으로써 자기기만적인 존재로 길러질 뿐이다. 솔닛은 이런 혐오의 감정을 성폭력의 근저에 위치시킨다. 

“남자가 된다는 것이 나약함에 대한 혐오를 익히는 것이라면, 자기 내면의 나약함은 물론이고 자신을 대신해서 그 나약함을 품어주는 나약함까지 혐오하게 되기 때문이다.” - (57쪽) 

다양성과 차이가 새로운 가치로 칭송받는 포스트모던 한 시대 공감능력의 부족과 나약함에 대한 혐오는 더욱 악화되기도 한다. 일상화된 음란물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속 남녀 관계는 매우 폭력적이다. “남자아이들과 젊은 남자들 중 많은 비율이 남자의 만족을 권리로 여기지만 여자의 권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학술적 연구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110쪽) 이렇게 폭력적인 영상에서 “여성은 거의 늘 중립적으로 반응하거나 즐겁게 반응했다. 이보다 더 음험한 사실은, 가끔 여자가 파트너에게 그만두라고 말하지만 그러다가도 이내 순종하여 아무리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행위라도 차츰 즐기기 시작한다.”(111쪽) 남녀 간의 공감과 이해, 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어린 남자들은 점점 더 그런 능력을 박탈당하거나 스스로 버리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피해자인 여성에게 목소리를 돌려줌으로써 가해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에게 그들도 피해자임을 자각하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솔닛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은 끊임없는 타협, 끊임없는 대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절당하고 버려질 위험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사랑을 얻을 순 있지만 강탈할 순 없다. 사랑은 내가 모조리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상대에게도 권리와 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협동하는 과정이고, 최선의 경우에 그 타협들이 즐거운 놀이가 되는 과정이다. 성폭력은 그런 나약함을 거부하는 행위인 경우가 많고, 남성을 가르치는 이런저런 지침들은 남자들로 하여금 선의로 흔쾌히 타협하는 기술을 잃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 무능력과 권리의식이 악화하면, 상대를 통제하려는 분노, 쌍방의 대화를 일방적인 독백으로 바꾸려는 분노, 사랑이라는 협동행위를 상대를 폭행하여 자신의 통제력을 확인하는 행위로 바꾸려는 분노가 된다.” - (58쪽)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Me Too' 운동은 지금까지 강요되었던 침묵을 깨는 거대한 물결이다. 그러나 이 물결은 단순히 가해자 몇 명을 처벌하는 것에서 끝날 수 없다. 침묵을 깨는 목소리들은 피해자들 사이의 연대를 낳을 것이고 그 연대는 폭력과 억압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행과 기존 질서를 흔들어서 남성들에게 잃어버린 공감능력을 되돌려 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였지만 대학당국과 사법체계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행동했던 스탠퍼드의 한 여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모든 곳의 소녀들에게, 나는 당신 곁에 있습니다. 혼자라고 느끼는 밤에, 내가 당신 곁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의심하거나 무시할 때, 내가 당신 곁에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내가 매일 싸웠습니다. 그러나 당신도 싸움을 멈추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침묵당하지 않을 겁니다.” - (75쪽)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면책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 앞으로는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사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 달리 말해, 피해자와 가해자의 승산이 바뀔 만큼 세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여자들에게는 이제 목소리가 있다”고.(138쪽)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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