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66) 대정 망아지 야무지다
 
* 대정 : 서귀포시 대정읍 지역의 통칭
* 몽생이 : 망아지, 말의 새끼
* 요망진다 : 야무지다, 당차고 다부지다

서귀포시 대정읍은 제주 지역에서 제일 바람이 세고 거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정은 행정구역상의 명칭이고 예로부터 모슬포라 일컬어 왔다. 날씨가 얼마나 짓궂었으면 그 명칭을 희화(戱化)해 ‘못살포’라 했을까. 

그런 험한 날씨가 오히려 그곳 사람들의 기질을 강하고 모질게 했을지도 모른다. 제주사람들은 모슬포 주민들의 몸에 밴 강인한 정신을 그 풍토성에서 찾는다. 그런 기후나 환경요인이 사람들을 다부지게 만들어 똘똘한 기질을 형성했을 것이란 얘기다.

여기서 ‘대정 몽생이’는 직접적으로는 대정의 망아지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대정 고을 토박이’를 상징적으로 빗대고 있다.

실제로 모슬포 출신들은 여느 지역에 비해 강한 기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판이다. 그만큼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이 돋보인다. 그런 특성은 대인관계에서도 도드라져 타 지역 사람들과 비교가 될 정도로 강하게 각인돼 있다.

반면, 모슬포 사람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도 더러 있다.
  
“대정 몽생이 요망진 첵 허여도 목안 가민 맥 못 춘다”(대정 망아지 야무진 체하여도, 목안 가면 맥 못 춘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대정 몽생이’는 말할 것도 없이 ‘대정 사람’, 곧 ‘모슬포 출신’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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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미 말과 망아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한데 그 뒷부분에 숨은 뜻이 흥미롭다. 음미할 만한 어투다. ‘~한 첵 허여도’로 말꼬리가 묘하게 돌아간다. 대정, 그곳 사람이 제아무리 야무지고 똑똑한 체하지만 대정 안에서나 그렇지, 제주목의 관아가 있는 제주성(濟州城) 안, ‘목안’에 가면 주눅 들어 제대로 행세하지 못한다 함이다.

배배 꼬며 뒤트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이 말에는 ‘대정’ 사람들이 표가 나게 다부진 모습을 보면서, 딴 마을 사람들이 견제해서 빈정대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를테면 모난 돌이 정 맞는 격이다.

제주의 옛 선인들의 비유나 풍자적 수사(修辭)는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사리를 꿰찬다. 이치에 닿아 들으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비단 대정 사람에 국한하지 않는다. 옛날의 제주목안은 제주 정치‧경제‧사회의 중심지라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곳이었다. 아무나 얼씬거리지 못하던 곳이라는 말이다.
  
이런 속담도 있었다.

“관덕정 마당에 심어당 논 장독인다” (관덕정 마당에 잡아다 놓은 수탉이다)
옛날 관덕정은 제주목 관아의 앞마당이었다. 관존민비(官尊民卑) 차별의식이 우심했던 옛 시절에는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그러한데다 그 마당 또한 넓고 커서 촌사람들에게는 엄엄한 곳일 수밖에 없다. 어쩌다 그곳에 저들 세상에서 대장 노릇하는 억센 수탉을 잡아다 놓았을 때, 그 수탉인들 활개 치며 거들먹거릴 수 있을 것인가. 이 웬 영문인가 해 어쩔 줄 몰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인 경우도 매한가지다. 

주눅 들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실감 나게 꼬집었다. 그러니까 내로라 껍적대는 사람도 기를 못 쓰고 마는 모습을 빗댄 것이다. 앞의 “대정 몽생이 요망진 첵 허여도 목안 가민 맥 못 춘다” 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대정 사람이 등장하는 속담이 또 있다.

“대정서 죽 쑤던 사름, 목안 와도 죽 쑨다”(대정서 죽 쑤던 사람, 제주목안 가도 죽 쑨다)
숙명론이다. 바다로 에워싸인 섬에 갇혀 살아서 그랬을까. 선인들 의식구조 속에는,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현명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시골인 대정에서 죽 쑤는 일을 하는 게 못마땅해 관중인 목안으로 거처를 옮긴다 해도 늘 해 오던 본연의 업(業)인 죽을 쑬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는 타고난 직분이 있는 터라 그것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해도 안된다 함이다.

박토를 갈아엎고 북돋아 모진 비바람에 부대끼며 농사짓다 흉년이라도 들 양이면, 체념에 사로잡히기도 했으리라. 이런 심약해진 마음에 운명론이 깃들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속담에서건 대정 사람들이 야무지고 당찬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대정 몽생이 요망진다”의 ‘몽생이’는 대정 사람들의 체질이면서, 또랑또랑하고 다부진 제주인의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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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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