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89) 이병철, 《석주명 평전》, 그물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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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 《석주명 평전》, 그물코, 2011. 출처=알라딘 홈페이지.

석주명은 나비 박사다. 예술학을 전공하고 미술박물관에 종사하는 필자가 자연과학 분야의 생물학 연구자를 다룬 『석주명평전』을 꺼내든 이유는 그가 자신의 전공인 곤충학을 토대로 자연과 인문을 넘나든 융합지식인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특히 그가 과학박물관 종사자로서도 헌신했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체계적인 박물관 제도를 정립하지 못한 현실에 비추어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유물의 수집, 보존과 전시 뿐만이 아니라 연구기관으로서의 박물관 기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준 한국 박물관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에는 미술박물관 종사자인 필자가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 석주명’을 한국 나비 연구의 대가이자 박물관 종사자의 대선배로 모시는 마음이 담겨있다.

석주명(1908~1950, 평양 출생)은 1931년부터 1950년까지 20년간 나비 채집을 위해 나라 전체를 답사하면서, 전국토의 나비를 연구하여 새로운 생물분류학 학설을 세움으로써 한국 나비의 계통 분류 체계를 완성한 연구자다. 특이한 것은 그가 제주도에 머문 기간에 제주도 방언을 연구하여 국어학과 제주도학에 업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또한 평화와 애국 운동의 일환으로 에스페란토어 보급에 앞장선 언어학자다. 그는 산악활동을 하며 국토를 연구했는데, 백두대간의 흐름을 밝히고 독도 학술 조사를 수행하는 등 한반도와 여러 섬을 누볐으며, 녹화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에 충실했다. 애석하게도 전쟁의 혼란기에 우발적인 사건으로 요절했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의 석학으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세기를 넘어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비 연구자 석주명의 삶과 학문은 찬란하다.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졌다’고 말한 석주명의 최대 업적은 나비의 분류학에 있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 학자들이 수행해놓은 한국 나비 분류의 오류를 수정한 것이다. 몸체의 크기나 무늬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종으로 분류해 놓은 것들을 바로잡아 동종이명 921개 중에서 844개의 종의 등록을 말소했다. 그는 ‘개체 변이에 따른 분포 곡선’ 이론을 창안했다. 그것은 생물분류학의 혁신이었다. 그의 이론은 최종적으로 조선의 나비를 246종으로 분류하는 성과를 냈다. 21세기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251종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실로 대단한 위업이다.

조선 전역을 답사하며 모은 75만여 마리의 나비를 채집, 분류하여 펴낸 『조선산 나비 총목록(A synonymic List Butterflies of Korea)』(1940)은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의 소장품이다. 당시 전세계에서 30여 명에 그친 세계나비학회의 회원 석주명의 위업이다. 복식연구가로 널리 알려진 누이동생 석주선은 6.25전쟁 중에 사망한 석주명의 유고를 피란시절에 어렵사리 보존했다가 1974년에 출간했다. 『한국산 접류 분포도(The Distribution Maps of Butterflies in Korea)』(1974)는 한국의 나비들이 분포하는 지역을 종마다 각각 한국 지도와 세계 지도 한 장씩에 붉은 점으로 표시한 지도 500장으로 이뤄졌으니, 한 연구자의 성과로 이룬 것이라고 믿기 힘든 일이다.

식민지 시절에 중등교사를 지낸 10여년 동안 그는 초인적인 열정으로 이 일을 했다. 1942년 34세의 석주명은 송도중학교를 사직하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 교실 소속인 개성의 ‘생약연구소’에 촉탁으로 들어갔다. 개마고원 일대와 경기, 강원, 경상남북도 등에서 나비를 채집하고, 경성 미나카이 백화점에서 세계의 나비 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1943년 35세의 나이에 석주명은 서귀포에 있던 ‘경성제국대학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근무(1943.4 - 1945.5)를 자청해서 전근했다. 이때부터 그는 제주도 나비 채집은 물론 제주 민요를 중심으로 제주 방언 연구를 시작했다. 제주도에 관한 것은 죄다 수집하고 채집하며 기록하는 제주도학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해방 전 2년여간 제주도에 머물렀던 석주명의 제주도 연구는 그 이후 해방공간 5년에 걸쳐 출판과 논문 발표로 이어졌다. 그는 2년 1개 월 간의 제주도 생활을 정리하고 개성 본소로 복귀한 1945년에 학술 논문으로 「제주도의 여다현상」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제주도학의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1946년에는 「제주도지명을 포함한 동식물명」, 「제주도남단부의 자연 더욱이 그곳의 접상에 대하여」 등을 발표했으며, 1947년에는 『제주도 방언집』을 출판했고, 1948년에는 논문 「제주도의 접류」를 발표했다. 그의 삶이 멈추기 한 해전인 1949년에는 『제주도 인구론 』, 『제주도 문헌집』을 출판했고, 논문 「제조도의 상피병」, 「제주도 방언과 비도언」, 「제주도 방언과 마래어」 등을 발표했으니, 나비 박사 석주명은 제주도학의 선구자로서도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일제시대에서 해방공간이 이르기까지 한국의 나비 연구에 매진한 석주명은 나비의 이름을 한글 중심으로 재정리했다. 이 책의 부록에 실린 <나비 이름 유래기>는 그가 1947년에 조선생물학회를 통과시킨 248종 조선 나비의 이름과 뜻을 소개하고 있다. 이름만 봐도 아름다운 그 모양이 그려지니, 나비 분류학에 엄청난 연구 성과를 남긴 석주명은 한글로 나비 이름을 정리한 ‘우리말 학문’의 선구자라는 점에서도 놀랍기 그지없다.

“가락지장사, 까마귀부전, 각씨멧노랑나비, 갈구리나비, 개마별박이세줄나비, 가마암고운부전, 거꾸로 여덟팔 검은테떠들썩팔랑, ... 호랑나비, 홍띠점박이푸른부전, 홍점알락나비, 홍줄나비, 황모시나비, 환세줄나비, 황알락팔랑나비, 후치령푸른부전, 흑백알락나비, 흰나비, 흰뱀눈나비, 흰점팔랑나비, 흰줄표범나비.” - 『석주명평전』 중에서.
나아가 그는 제주어와 함께 에스페란토어 강의를 하며 관련 교과서를 쓰는 등 언어학자로도 활동했다. 이 대목에서 그가 남긴 말, ‘누구든지 남이 하지 않는 일을 10년 간 하면 꼭 성공한다’는 명제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해방 후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으로 일하면서 국학대학에서 강사직을 맡은 석주명은 국학에 남다른 소명의식을 가졌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식민지를 겪은 지식인이 해방 후 인문과학 영역이 아닌 자연과학 영역에서도 학문적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절박한 마음을 담고 있다. 정치/경제적 식민을 벗어난 후 세기가 바뀐 지금까지도 학문적 식민을 재생산하고 있는 후학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나에게 유학을 권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이후에 외국에 간다 해도, 먼저 나의 학문, 즉 우리 강토를 중심으로 한 학문을 정리해 가지고, 남에게서 배우는 만큼 나도 남에게 가르칠 준비가 안 되면 떠날 마음이 없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후진 국가라고 할지라도 우리 땅의 자료를 계통 세우면 그것으로 선진 국민이라도 가르칠 수가 있는 것이다.” - 『석주명평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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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관장
현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전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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