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제주에 일생 바친 맥그린치 신부와 더스틴 교수...제주인이라면 기억해야

제주도에는 한라산, 오름, 폭포, 절벽과 백사장 같은 자연절경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자연경관에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숨결과 땀이 배어있는 곳, 소위 스토리가 있는 장소도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당깁니다.

한라산 서쪽 한림읍 금악 오름 일대 수백만 평에는 ‘성이시돌 목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한라산 동북쪽 구좌읍 만장굴 근처 곶자왈에는 ‘김녕 미로공원’이 있습니다.

이 두 곳은 공통점이 있으니, 그건 파란 눈의 서양인이 일생을 걸고 황무지를 개척해 제주도의 명소가 된 곳입니다. 성이시돌 목장은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가 60여 년에 걸쳐 만든 목장이고, 김녕 미로공원은 미국인 교육자이자 자선사업가 프레드릭 더스틴 교수가 35년 동안 공들여 가꾼 정원입니다.

우연스럽게도 최근 보름 어간에 이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스틴 교수는 5월 5일 향년 88세로 타계했고, 맥그린치 신부는 그보다 앞서 4월 23일 향년 90세로 선종(善終)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토록 사랑했던 성이시돌목장과 김녕 미로공원의 흙 속에 자신의 몸을 맡겼습니다. 두 사람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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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스물여섯 살에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로 제주 한림성당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오름의 목초를 바라보며 조국 아일랜드를 닮은 제주도를 생각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 사는 농민을 목축을 통해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고국에서 보낸 새끼 밴 요크셔 암퇘지 한 마리를 인천에서 제주까지 끌고 온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는 돼지를 트럭에 싣고 용산역에서 기차로 갈아타고 목포까지 갑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에 상륙한 후 한림까지 끌고 갑니다. 그는 이 돼지가 낳은 새끼를 농민들에게 나눠주어 양돈 품종 개량을 선도했습니다. 또 청년들에게는 ‘4-H클럽 운동’을 통해 농업기술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1961년 금악 일대에 목초지를 일구어 성이시돌 목장을 조성했습니다. 그는 돼지뿐 아니라 양과 소도 기르면서 제주도 농민들에게 낙농을 권장했고,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목장을 방문하여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방직기술을 가진 아일랜드 수녀를 여러명 불러 양모를 원료로 옷감을 짜는 한림수직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제주를 떠나 부산의 방직공장에 취직했다가 이유도 모른채 사망한 한 소녀의 슬픈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제주도에 공장을 짓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한림수직은 한때 서울의 고소득층에 잘 팔리면서 1,300명의 여성을 고용하는 제주도의 큰 기업이 되었지만 2004년 중국의 헐한 양모제품이 쏟아지면서 문을 닫았습니다. 

제주도가 농업 사회였던 1960~70년대 사제복(司祭服) 차림의 맥그린치 신부가 금악 오름에 올라가 목초 지대를 바라보는 모습이 마을 사람들 눈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당시 그의 모습은 원주민들에겐 성직자이자 개척자의 양면을 지닌 기묘한 존재로 각인됐습니다.

그는 가끔 고국 아일랜드를 방문하면 제주도에 좋은 것은 제도든 가축이든 물건이든 들여오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는 곗돈을 떼이는 주민들을 보며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성이시돌 목장 안에 글라라수녀원 등 교회시설 외에도 성이시돌병원을 지어 주민을 돌보고 말년에는 죽음을 앞둔 환자를 위해 무료 호스피스병원 사업을 펼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1975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습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가졌습니다. 한국 사람들조차도 척박한 땅과 4·3사태로 피폐해진 제주도를 거들떠보지 않을 때, 그는 제주도의 땅과 농민을 사랑한 서양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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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프레드릭 더스틴 교수. 출처=김녕미로공원 홈페이지.

김녕 미로공원을 만든 프레드릭 더스틴은 지역 사람들에겐 ‘교수님’으로 통합니다. 그는 70년대와 80년대 제주대학에서 영문학과와 관광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제주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광산회사 고문과 양계장을 경영했던 사업가이기도 했습니다.

더스틴 교수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2년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미국 대학에 다니던 그는 한국에 파병되어 주한 미군 7사단 군악대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는 클라리넷 주자였습니다. 그는 제대 후 미국에 돌아가 대학을 다녔는데 한국인 멘토로부터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라는 충고를 듣고 1955년 연희대학교 강사로 시작하여 중앙대학교 홍익대학교 세종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이때 사귄 소설가 정비석, 시인 조병화, 신문기자 최병우 등이 더스틴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더스틴 교수는 1971년 마리 루이스 겝하트와 결혼한 후 제주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제주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2년 만에 아내가 암으로 타계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더스틴 교수가 평생 제주에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983년 영국인 친구가 그에게 건네준 ‘미로'(迷路)디자인에 대한 기사를 보고 난 후였습니다. 더스틴 교수는 김녕에 마련한 그의 땅에 미로공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영국의 세계적 미로 디자이너 애드리언 피셔와 국제우편을 통해 연락하며 미로공원을 설계했습니다. 그는 드디어 1987년 영국에서 구입한 상록수 렐란디(Leyllandii)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랠란디는 속성으로 성장하고 가지가 빽빽하게 자라기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겐 매력적인 정원수입니다. 미로공원 조성에 제격의 나무입니다.  

더스틴 교수는 김녕 미로공원을 완성하고 1995년 무료로 개방한 후, 1997년부터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미로공원에서 생긴 수입을 지역 사회에 환원하는 자선사업가였습니다. 그는 매년 수천만 원씩 그가 교수생활을 했던 제주대학교에 기부했습니다. 그가 제주대학에 기부한 총액은 7억 원이 넘습니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 독신으로 살았으며, 그가 남긴 것은  1,300여 그루의 아름다운 상록수 렐란디와  미로공원에 떼 지어 다니는 수십 마리의 고양이입니다.  

21세기 들어, 특히 지난 10년간 제주도는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국제자유도시라는 이름 아래 외국인 투자유치 및 노동자 취업이 이뤄졌고, 서양인, 중국인, 일본인, 동남아인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제주도가 외국인이 살거나 구경하기에 좋은 곳으로 바뀌면서 일어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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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종 전 한국일보 주필·자유칼럼그룹 칼럼니스트.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런 변화를 보면서 맥그린치 신부와 더스틴 교수가 제주도에 바친 삶이 더욱 값지게 보입니다. 그들은 주민들이 정말 척박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 때 제주에 찾아와 농민을 일깨우고 황무지를 개간했으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의적인 미로공원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생기는 이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제주도의 변화 속도를 볼 때 머지 않아 제주도를 움직이는 주류 세력이 이 두 서양인이 흘린 땀과 애환을 별로 기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성이시돌 목장의 초원과 미로공원의 렐란디 상록수가 오래오래 남아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속삭여 주면 좋겠습니다. / 김수종 전 한국일보 주필·자유칼럼그룹 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를 받아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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