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71) 있노라고 거들먹거리지 마라

* 싯노랭 : 있다고, (싯다=있다)
* 치세허지 : 거들먹거리지, 우쭐거리거나 으스대지

대체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눈 아래 깔아보고 업신여기기 일쑤다. 위에 군림해 무시하려 든다. 하지만 언제 파산해 폭삭 망할는지도 모르는 게 사람의 일이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인간사 아닌가.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일수록 자중자애 해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위화감을 덜 수가 있다. 가진 자라고 해서 우쭐대서 세상이 제 것인 것 마냥 처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지도층의 국가 사회에 대한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뜻하는 말이다.

한데 한국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이 나라 지도층의 도덕성이 왜 이렇게 추락했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노블레스 말다드(Noblesse Malade). 병들고 부패한 귀족이라는 비아냥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온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이 나라 대부분의 지도층이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진 일가의 갑질 횡포가 알려지면서 세간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 그들 눈에는 직원들이 노예로 보인 걸까. 갑질 행태를 고발하는 목소리가 봇물을 이룬다. 주말에 광화문광장에서 한진 직원들이 가면 쓰고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는 걸 TV로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들의 분노가 마침내 ‘조양호 일가 퇴진’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조양호 회장의 부인 이명희의 황제 식탁이 입에 오르내린다. 그가 철철이 세계 각 곳의 지점에 지시해서 특산품을 공수하도록 해 왔다는 것이다. 

식탁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다달이 마치 조선시대 왕의 진상품처럼 세게 방방곡곡의 농산품이 올랐다고 한다. 4월의 과일 중국 비파, 7월을 책임진 터키산 살구, 9월의 선택 중국 북경 대추하는 식이다. 점입가경인 게 이들 농산품 모두 수입금지 품목이라지 않은가. 회장 사모님 명령이라 충견처럼 받들지 않을 수 없던 대한항공 해외 직원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상상만 해도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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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항공 직원들과 가족, 지지하는 시민 등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일가 및 경영진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1차 촛불집회를 열었다. 출처=오마이뉴스.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다. 그 놀라운 실례를 기억하고 있다.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 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 전쟁에는 영국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6.25전쟁 때만 해도 미국 상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 수행 중 전사했다. 공산권에도 사례가 없지 않다.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이 6‧25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 수습을 포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될 만큼 유명하다.

기부 하면 빌 게이츠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70년대 최고 명문 하버드대를 중퇴, 마이크로소프트(MS)를 설립해 실리콘 밸리의 성공신화를 이룬 세계 회고의 부호이면서 가장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돈이 많다고 기부를 많이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빌 게이츠는 다르다. 상상을 초월할 기부다. 이미 기부한 금액이 우리 돈 무려 90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최고급 아파트 210채, 대통령 전용기 300대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빌 엔드 빌린다 게이트재단’을 설립한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기부의 전범(典範)을 보여준다.

그의 기부는 그치지 않고 이어진다. 전 재산 중 95%를 죽기 전에 사회에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2000년 MS 최고 경영자에서 물러났고, 2008년에는 자선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33년 간 이끌던 MS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은퇴했다.

하버드대를 중퇴했던 빌 게이츠가 30년 만인 2007년 명예 졸업장과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한 말이 귓전을 울린다.

“이 세상에 지독한 불평등, 즉 수백만 명을 절망에 빠뜨리는 건강과 부, 기회의 불균형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하버드를 떠났다…자선사업에 서게 된 것도 세상에 만연한 질병과 죽음, 무지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느낀 큰 충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기 어려운 게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자다. 돈 많은 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쉬움이 크다 함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제발 갑질만이라도 하지 말았으면 좀 좋으랴.

‘싯노랭 치세 말곡, 엇노랭 기 죽지 말라’라 하기도 한다. 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고, 없다고 기 죽지 말라 함이지만, 없는 사람이 처신하기도 실로 힘든 세상이다. 그래도 주눅 들 건 없지 않은가. 한세상 살면서 남의 눈치 볼 것도 아니다. 지은 죄가 없으면 당당한 법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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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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