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71) 낙숫물이 디딤돌에 구멍 뚫는다

* 지싯물 : 낙숫물
* 잇돌 : 디딤돌, 댓돌
* 고망 : 구멍[穴 : 구멍 ‘혈’]
* 또룬다 : 뚫는다
  
처마 밑으로 지는 빗물이나 눈 녹은 물은 항상 그 자리로 떨어진다. 한곳으로 계속 지다 보면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 아래 댓돌이 뻥하게 파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일러 낙숫물이 댓돌에 구멍을 뚫는다고 했다. 물방울이 돌에 구멍을 내다니 경이로운 일이다. 
  
무슨 일에 몰두하는 것, 집중해 매진하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다는 이치를 일깨워 준다. 외곬수의 끈기와 집념을 빗대는 말이다. 

이를테면 무슨 일에든 절차탁마해야 목표에 제대로 도달할 수 있음을 토설한 것이다. 과업을 해 내려는 성취동기와 끈기 없이 되는 일이 없다. 초지일관하는 의지의 실천, 도전자의 기개다. 그것은 성취인의 행동특성이다.

절차탁마(切磋琢磨). 

골각(骨角)이나 옥석(玉石)을 자르고[切], 갈고[磋], 쪼고[琢], 닦는다[磨]는 뜻이다. 학문과 덕행 혹은 도를 애써 닦음을 비유해 하는 말이다.

<논어> ‘學而’ 편에서,
자공이 공자에게 물어 이르되,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면 어떠합니까?”하니, 공자께서 이르시되, “괜찮구나.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니라.”
자공이 이르기를, “시에 나오는 끊는 듯 닦는 듯 쪼는 듯 가는 듯하다 함이 바로 이것을 이름이오니까?”
공자께서 “사야, 이제야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수 있구나. 지나간 일을 일러 주니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루어 아는구나”라고 했다.
이후, 계속해 인구(人口)에 회자됐다.
한편, <대학>에서는 ‘자르고 갊(如切如磋)은 배움을 말하고, 닦고 쫌(如琢如磨)은 스스로 수양함(自修也)’라 이를 원용했다. 자신의 현실적 위치에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갈고 닦으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이 말이 문학 창작과 관련해서는 시나 소설 혹은 수필 같은 자신의 장르에 일가(一家)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를 뜻하기도 한다. 물론 이 말 속에 내재하는 함의(含意)는 결코 미사여구의 문장, 미문(美文)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허하고 단순한 수사미학을 의미하지 않고, 정신적 덕성 함양이 전제된 이른바 작품이 갖는 철학적 사유의 깊이와 품격을 지적함이다. 곧 문학적 용어로서의 절차탁마는 문체와 수사의 조탁(彫琢)은 말할 것 없고 시인 작가의 치열한 인격 도야를 내포한다. 인격의 갈고 닦음 없이 인생의 진실을 작품화했다면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스스로 힘쓰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리라. ‘자강불식(自强不息)’하라 함이다.
  
공자는 “나는 여색을 좋아하는 듯,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吾未見 好德 如好色者也)고 했다.

자신이 어째서 학습과 연공을 지속하지 못하고, 결국 학문도 지지부진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한다. 남자라면 누구나 여자를 좋아한다. 본성이 그러하므로 그것을 딱히 허물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테다. 공자가 개탄한 바는,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듯 배움을 좋아해서 ‘덕’을 체득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한 것이다.
 
하늘은 잠시도 운행을 멈추는 일이 없다. 시냇물이 끊임없이 흐르듯 연공과 학습을 멈추지 않아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법이다. ‘덕’이란 천지의 이치를 터득하는 일. 수신(修身)의 완성은 그 덕을 체득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갈린다. 여자를 멀리하고 십 년을 하루같이 연공하고 학습해도 될까 말까 한 것이 학문의 세계다.

IE002343092_STD.jpg
▲ ‘지싯물이 잇돌에 고망 또룬다.’ 이번 6.13지방선거에서도 실패와 낙선에 굴하지 않고 도전하는 후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부산시장에 네 번째 도전하는 오거돈(69)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사진은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30대 기자와 팔씨름 대결하는 오 후보. 출처=오마이뉴스.

비슷한 속담이 있다.

‘먹돌도 똘람시민 고망 난다’ 
(먹돌도 뚫고 있으면 구멍 난다)
‘혼번 찍엉 안 벌러지는 낭토막도 열 번 찍으민 벌러진다’ 
(한 번 찍어서 안 벌어지는 나무토막도 열 번 찍으면 벌어진다)
처마 밑 지싯물(낙숫물)이 그 아래 댓돌에 떨어지면서 구멍을 파는 데서 삶의 이치를 터득한 선인의 지혜야말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구체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공리공론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사리를 꿰뚫었으니 말이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 참 영특한데, 끈기가 없는 것 같다. 도전해 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 실로 걱정스럽다. 쉽게 되는 일이 세상 어디 있으랴. 끊임없는 연마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자연이 일깨우는 가르침에 눈 떠야 하리. 

‘지싯물이 잇돌에 고망 또룬다.’ 
작은 물방울의 힘은 엄청난 것이다. 그 힘은 계속 떨어지는 데서 나온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증명사진 밝게 2.png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