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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 결과 보며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2018년 06월 18일(월) 09:47
서영표 교수 news@jejusori.net
[BOOK世通, 제주 읽기] (96) 샹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인간사랑, 2006, 이행(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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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샹탈 무페(저자), 이행(역자), 《민주주의의 역설》, 인간사랑, 2006. 출처=알라딘.

6.13 지방선거 직전 공약을 점검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날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정치는 투표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시작한다’였다. 선거운동 기간에는 머슴을 자처하면서 고개를 숙이던 정치인들이 당선되고 나면 유권자 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지겹도록 보아온 우리들에게, 당선 후 4년간 정치인들을 감시하고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보다 더’ 민주적인 제도를 열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이 투표소에서 시작되는 정치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다. 우선 선거제도 자체가 민주주의에 한참이나 미달한다. 우리의 선거제도는 거대정당이 권력을 분점하고 이미 너무 오래 고여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정치판을 변화시킬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진보적이지 않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을 진보, 심지어는 좌파라 불러주고, 보수와는 거리가 한참이 먼 극우정치집단을 보수라 불러주는 역할극에 충실한, 너무나 충실해서 종국에는 실제로 자신들이 진보와 보수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대정당들은 낡고 협소한 정치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기득권을 지키는데 견고한 동맹군인 것이다. 

역할극은 착시를 불러온다. 권력을 사적 이익 추구에 남용했던 이명박, 국정을 농단했던 박근혜 정부의 ‘비정상적’ 모습은 한국 사회를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정글로 변화시키는데 앞장섰던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를 ‘정상’으로 간주하도록 했다. 실패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어느새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복권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라는 ‘비정상성’을 통해 스스로를 ‘정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게 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출범이 ‘촛불시위’라는 거대한 민주주의의 물결에 의해 가능했기에 이 정부의 정치적 수사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비록 아직 말에 그치고 있지만 분배와 일자리 안정성, 탈핵과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우파정권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대결국면으로 치닫던 남북관계를 화해국면으로 이끌면서 시대착오적인 냉전질서를 허무는데 앞장서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는 점이 빠질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문재인 정부의 허구적 ‘진보’를 뒷받침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명박-박근혜라는 ‘비정상’이다. 진보는 ‘냉전적 극우+노골적 시장주의’가 아닌 ‘어떤 것’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둘째, 촛불시위가 상징하는 변화에 대한 갈망을 수용할 진보적(좌파적) 정치세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생겨난 시장자유주의세력의 어부리지(漁父之利)다. ‘촛불’과 ‘문재인 정부’ 사이에는 오직 우연적이고 선택적인 친화력이 있을 뿐이다. 촛불이 원했던 것은 ‘정상’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정상’을 다시 복구하는데 멈추어 있으면서도 ‘비정상’을 빌미로 그것을 진보로 표상하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끊임없이 ‘촛불’을 ‘혁명’으로 소환한다.  

마지막으로 낡은 ‘정상’에 갇혀 있는 문재인 정부의 한계는 남북관계라는 외생적인 요인에 의해 가려졌다. 남북의 화해와 통일은 그 자체로 선(善)이다. 분단은 민주주의를 제한하고 정치구도를 왜곡했으며, 분단에 의해 지불해야 하는 경제적 비용도 엄청나다. 무력충돌과 핵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남북화해와 통일을 무조건적으로 환영할 수는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인권이나 환경, 그리고 사회적 유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시장맹신주의에 의해 고통 받고 있다. 촛불을 통해 터져 나온 아우성과 몸부림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시장맹신주의를 그대로 두고 말로만 ‘촛불정신’을 이야기하는 정치세력이 낡고 협소한 대의정치 안으로 숨어버리는 것을 방관하게 하는 것이 남북관계의 진전과 통일에 대한 부푼 꿈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좀 더 길게 보면 북한이 중국처럼 자본주의로 이행한다면 자본의 쓰나미가 한반도 전체를 휩쓸고 다닐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값싼 노동력과 자원의 공급처로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남한의 사회적 모순과 북한의 전체주의적 사회가 통일을 통해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각각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 겹쳐지면서 악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공론장에서 이런 문제를 논의할 여지가 있을까?

한 발 더 나가보자.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시장자유주의 정권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에 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자유주의 정권, 특히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시장화를 민주주의와 등치시켰다. 정치권력의 간섭으로부터 시장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민주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장의 자유는 자본의 독재였으며, 자본의 독재는 민주주의를 텅 비게 만드는 탈정치화(depoliticization)에 다름 아니었다. 둘째, 민주주의는 대결, 적대, 경합을 핵심으로 하지만 자유주의정권들은 중도를 표방하며 민주주의를 축소시켰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민주주의의 역설》이 개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표상이다. 다소의 논리적 비약을 무릅쓰고 무페를 통해 서유럽의 민주주의 정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한국에 적용하기 전 그녀의 분석대상인 서유럽 중도좌파 정당들의 중도노선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는 중립적 지형에서 움직이고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권력의 관계와 그것의 사회에서의 구성적 역할은 망각되어지고, 그것이 수반하는 갈등은 대화를 통해서 조화될 수 있는 이익의 단순한 경쟁으로 환원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엘리트 간의 경쟁으로 보고, 경쟁적 세력의 존재를 보이지 않게 하고, 정치를 교환과 타협을 위한 협상으로 환원시키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관점이다. 나는 정치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급진적’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정말 기만적이고 신노동당이 주장하는 급진적 비판은 보다 더 민주적인 것을 위해 기여하기보다는 실제로는 급진적 정치의 기본적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민주주의의 역설》 169쪽
무페는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주도한 영국 노동당의 새로운 노선, 즉 신노동당노선이 “경쟁자들을 정의하지 않음으로써 근본적인 이익의 갈등을 회피할 수 있다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69쪽) 1980년대 공고화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해 “새로운 헤게모니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그것에 굴복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80쪽) 그리고 이러한 투항과 굴복은 민주주의를 무력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무페에게 민주주의는 정치권력의 소재지, 권리의 담지자(膽智者)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권리를 가지는 자들이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여하한 기준 없이는 인민의 의지는 결코 알 수 없게 된다.” 즉 민주주의의 논리는 ‘인민’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우리’를 가르고 경계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72쪽)

그러나 민주주의적 정치는 결코 인민을 완벽하게 정의하거나 구성할 수 없다. 인민은 한 순간도 완벽하게 경계 지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민의 정체성이 투쟁과 분리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러한 정체성은 결코 완전히 구성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 복수의 그리고 경쟁적인 정체성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무페는 자유민주주의의 특징은 “인민과 그것의 다양한 정체성을 이루는 과정 사이의 구성적 간극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구성적 간극을 메우려는 어떤 시도도 민주주의를 말살하거나 축소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경쟁은 “영구적으로 개방된 채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91쪽)

무페는 유럽의 중도주의가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적대를 부정하고 중립성이라는 맨 뒤쪽에 감추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폭력’을 숨기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43쪽) 신자유주의의 폭력적 상황에서 의해서 생겨나는 불만과 좌절은 정치적 통로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제도정치의 과소와 제도 바깥 정치의 과잉을 초래한다. (174쪽) 그런데 민주적인 통로를 봉쇄당한 제도 바깥 정치는 다른 통로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게 된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는 대중의 정치적 환멸이 팽배하는 바로 그 순간 극우정당들의 혐오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민주주의적 가치는 훼손되고 와해된다. (126쪽) 이러한 극우정당의 성장의 이면이 중도좌파 정당들 스스로의 우경화, 그리고 이러한 우경화의 물결 속에서 초래된 좌파의 몰락이다. 무페는 “좌·우의 대립은 정당한 갈등이 드러나고 제도화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178쪽) 그런데 좌파의 자리는 비어있고, 중도적 합의라는 이름 아래 갈등과 적대는 부정 당한다. 현실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그리고 한 순간도 정치 세력 사이에 그어진 적대선에 의해 완전히 표현될 수 없는 사회의 모순은 극우적 선동의 제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시장자유주의자세력(더불어민주당)과 반공극우세력(자유한국당)의 대립은 적대와 경쟁의 외양을 띠고 있었지만 고작해야 사이비민주주의였을 뿐이었다. 양자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을 구성하려하지 않았다. 협소한 대의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엘리트정치의 장에서 서로를 오인된 이름으로 불러줌으로써 서로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무페가 주장하는 헤게모니적 정치, 즉 정체적 주체를 호명하고 구성하는 점에서는 반공극우세력이 더 후한 점수를 받을 수도 있겠다. 그들은 대단히 퇴행적인 방식이나마 반공의 구호 아래 인민과 인민 아닌 자들을 가르는 헤게모니적 실천을 했다. 

시장자유주의세력은 퇴행적이어서 곧 소멸하게 될 극우적 방식과 대결하는 정치적 주체를 구성하려 하지 않았다. 서유럽 중도좌파 정당들이 그랬던 것처럼 합의를 주장하고 적대를 부정했다. 정치를 여전히 소수 엘리트의 일로 한정하면서 민주주의의 힘인 적대와 경쟁을 제거하고 ‘협치’와 ‘합의’의 허울을 내세우면서 ‘현행의’(as usual) 질서를 방어하는 데 공모했다. 

극우적 헤게모니의 소멸이 새로운 헤게모니적 정치로 연결되지 못할 때, 즉 정치엘리트 사이의 협상이 협치와 합의의 정치로 과장될 때,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으로부터 연원하는 불만과 좌절은 표현될 수 있는 통로를 차단당했다. 민주주적인 경합과 경쟁, 결코 완결될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시도되어야 하는 인민을 구성하는 헤게모니적 정치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제도정치도 과소(過小)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냉전적 극우와는 다른 방식의 극우의 씨앗이 뿌려진다. 혐오의 정치가 일상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여성혐오, 동성애혐오, 이주자에 대한 혐오가 스멀스멀 한국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 과정에 가속도가 붙게 되면 북한 주민을 이등시민으로 낙인찍는 현상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 

‘촛불’은 거대한 변화에의 열망이었다. 6.13 지방선거를 통해, 비록 미약하지만 드러났던 청년과 여성, 녹색운동의 목소리는 이런 변화의 열망이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여전히 대다수가 그러한 진보에 대한 열망을 결코 진보일 수 없는 정치세력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아마 이런 상황에 대한 상당부분의 책임은 좌파라고 자임하는 정치세력들에게 있을 것이다. 정치를 복원하고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게 하는 좌·우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타협과 합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차단당한 불만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하는 통로를 만들기보다 시장자유주의세력을 ‘진보’로 오인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고 있는 소위 ‘진보정당’들 말이다. 정치적으로 아직 순수한 아마추어인 녹색당의 목소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반갑지만 서글픈 일이다. 유력한 진보(라고 주장하는) 정당이 이번 지방 선거 결과가 절반의 성공이라고 자축하고 있다는 소식은 너무 희극적이어서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그래도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해본다. 현행의 질서를 옹호하는 시장자유주의세력이 보수로 자리 잡고 그들이 부정한 적대를 긍정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대결하는 좌파 정당의 경합적 정치, 그리고 그들을 압박하는 녹색당 같은 사회운동적 정당들의 공존. 

촛불의 에너지는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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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의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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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돌 2018-06-18 13:44:02    
촛불로 얼마 남지않은 터럭을 기실려불카?
22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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